▲ 안혜연 교무 / 전북원음방송
얼마 전 지인의 추천으로 교도 작가인 정도상의 〈마음오를꽃〉이라는 소설을 읽게 됐다. 이 책은 삶을 초기화 하고 싶었던 '규'와, 왕따의 삶이 너무 괴로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래'가 겪는 저승의 고통과, 남겨진 주위 인연들과 가족들이 겪는 이승의 혼란과 괴로움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현실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절박한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소설은'너희들 죽으면 안돼'라는 작가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규'와 '나래'가 겪는 저승에서의 고통은 참으로 소름이 끼칠 만큼 잔인해서, 죽고 싶은 맘이 싹 달아나게 한다. 게다가 이 지옥의 고통은 스스로 끝낼 수조차 없다.

그에 비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날, 함께 끝날 거라 생각할 수 있는 현실의 지옥은 차라리 희망적이다. 내 느낌대로라면, 이 책을 읽는 청소년이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에 충실한 이런 느낌과 함께, 교무인 나는 이 소설을 읽고 교당의 역할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머물게 한 부분들은, 규의 엄마가 교당을 만나게 되고 천도재를 지내는 과정들이었다.

'규'의 자살 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삶이 무너질 만큼 힘들어 하던 규의 엄마는 우연히 일원상이 그려진 교당을 발견하게 된다. 끌리듯 교당 안에 들어가니 법당에는 동그라미가 모셔져 있었다. 규의 엄마는 그 앞에서 온몸으로 울음을 토해 낸다. 그렇게 교당을 만난 규의 엄마는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오백배를 한 후 기진맥진해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이마 위에는 수건이 올려져 있고, 어느새 다가온 교무가 따뜻한 말과 함께 물 한 잔을 건넨다. 이런 인연으로 '규'의 천도재를 지내게 되고, 이런 모습이 저승세계의 판결을 주관하는 '일원 법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축생계에 떨어질 뻔한 '규'가 인간계로 다시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다시 태어나서도 자신의 업으로 인한 괴로운 시간들을 겪어내야 하는 숙제는 남아 있다.

방황하던 규의 엄마가 이끌리듯 들어간 교당에서 위안을 받고, 영혼을 천도하는 기연이 되는 과정을 그린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열려 있는 교당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당은 법회와 마음공부의 장소는 물론, 힘들고 지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치유의 공간도 됐으면 좋겠다. 누구이건 어느 때라도 들어가 아픈 마음을 실컷 토해낼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각 교당에, 혼자 조용히 기도하고 싶고, 아무도 모르게 오직 법신불 사은 앞에서 심경을 토로하고 엉엉 울고 싶을 때 언제라도 들어가 기도할 수 있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정도 관리의 어려움은 감수하더라도 '건져주 살려주 우짖는 저 소리'를 잦아들게 해 줄 곳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지치고 힘든 영혼이 길을 가다 문득 발견한 교당에 저절로 이끌려 들어가고 싶어지는 치유의 공간, 기도의 기운이 가득한 공간으로서의 교당이 점점 많아지기를 염원해 본다.

또 하나, 끝없는 지옥의 고통 속에서 이승의 가족들이 올리는 기도와 정성은 영가에게 그 고통을 잠시 쉬게 해 주는 숨통이 되고, 인간계로 이끌어 주는 힘이 되었다. 소설의 허구성을 떠나, 영가의 천도재에 임하는 우리의 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떠나간 영혼을 위해 살아있는 이들이 해줘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천도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승의 살아있는 자에게도, 저승의 영혼들에게도 다시 일어설 힘을 주고, 새로운 길을 찾아주는 곳이 교당이다.

또한 대종사의 교법을 먼저 만난 우리는 삶과 죽음의 길을 알게 됐으니, 그 길을 함께 갈 수 있게 사람들을 인도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