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타원 전삼삼 선진

성타원 전삼삼(成陀圓 田參參, 1870∼1948)은 혜산 전음광 대봉도의 모친이다. 그러니까 아타원 전팔근 종사의 조모요 전정희 국회의원의 증조모이다. 전삼삼은 아들인 전음광을 전무출신시켜 교단 창업기에 큰 역할을 하도록 한 유공인이다.

전삼삼은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태어났다. 영대(靈臺)가 밝아 한글은 물론 웬만한 한자는 독학으로 깨쳐 고대 소설도 술술 읽었다. 21세에 한 동네 사는 전영규(全永奎)와 결혼해서 살림을 이루고 명산대찰을 찾아 득남 기도를 올려 외아들 전음광을 낳았다. 아들을 혼인시킨 해에 남편이 죽고 재앙이 닥쳐 가세가 기울었다.

이 무렵 비단장수 삼타원 최도화를 만나 변산으로 인도되어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다. 원기 7년 음력 6월 25일이었다. 그해 섣달 그믐에 대종사가 만덕산에 행가했다. 전삼삼은 전음광의 장래를 위해 대종사와 영부시자(靈父侍子)의 결의를 맺게 하고 장차 살 길을 의논했다. 대종사는 전삼삼에게 전주로 이사할 것을 명한다.

전주 완산동으로 초가 삼간을 구해 이사했다. 이 집은 비록 오두막집이고 협소하기 이를 데 없으나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을 위해 여러 차례 내왕했고, 창립 인연들의 연락처로 사용되었다. 특히 원기 9년 3월에 서중안 송만경 이청춘 이춘풍 문정규 박원석 전음광 등 7인이 대종사를 모시고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임을 가졌으니, 교단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4월 29일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5월부터 한 달간 만덕산에서 열린 선(禪)에 전삼삼, 전음광 모자가 참석해서 더욱 신심을 발하였고, 전음광이 전무출신을 발원해 총부에서 근무하게 됨으로 인해 총부 구내로 이주했다. 한결같은 신성으로 대종사의 식사 수발은 물론, 모시고 공부하면서 아들의 전무출신 뒷바라지에 힘썼으며, 원기 10년 초여름 신축한 그의 사가(私家)에서 제1회 하선(夏禪)이 열렸다.

원기 15년 9월에 발간된 〈월말통신〉 제32호에 '전삼삼씨의 독지(篤志)'라는 제목으로 그의 미담이 소개되어 있다. 요지는 육십이 넘은 고령임에도 회중 공사라면 어느 때나 육신의 근고(勤苦)를 아끼지 않는다며, 금년 여름 농업부 뽕밭에 괴상스런 해충이 생겨나 뽕잎을 갉아먹으므로 그 벌레를 잡는 일에 여러 사람이 나섰는데, 전삼삼씨도 온종일 벌레잡기에 노력했다. 농업부에서 노인이 너무나도 노고가 많은 걸 보고 미안해서 수고비를 얼마 드리려 했더니, 살생이 죄가 되는 줄 익히 알면서도 공중살림을 위해 부득이 나섰는데, 댓가를 받으면 그 죄업을 어찌 감당하라는 거냐며 의미 깊은 금언(金言)을 하여 대중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대종경〉 교단품 12, 13장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공중사를 위해 부득이 살생계를 범하게 된 분명한 연유의 설명과 함께 당시의 투철한 공도정신이 소박하게 소개돼 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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