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에는 항상 담박(質素) 질소(淡泊)를 주장하라'
감자·콩깻묵에 물 붓고 끓인 죽으로 식사

소태산 대종사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특별히 구애하는 음식도 없었다. 〈대종경 선외록〉 원시반본장 8절에 대종사 변산 이춘풍의 집에 유련하실 때 춘풍의 아내 정삼리화가 조석 공양을 성심으로 올리니 대종사가 말했다.

"나는 본래부터 여러 가지 반찬을 놓고 먹지 못하였을 뿐더러 도가에서는 본시 담박을 주장하나니 이후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반찬 놓는 것을 폐지하고 오직 한두 가지에 그침이 가하니라. 세상 사람들은 분외의 의식주를 취하다가 스스로 패가망신을 하는 자 많으며 설사 재산이 있더라도 사치를 일삼은 즉 결국은 삿된 마음이 왕성하여 수도하는 정신을 방해하나니, 그러므로 음식에는 항상 담박 질소를 주장하라."

간고한 총부식사

암울했던 일제시기에 팔타원 황정신행이 총부 인근 내곳리에다 밭을 사주어 거기에서 수확한 감자가 총부에 사는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원이 됐다. 죽을 쑬 때에는 감자에 쌀을 조금 넣어 물을 붓고 끓였고, 밥은 기름 짜고 나오는 콩깻묵에 쌀을 조금 넣어 지어서 총부 대중이 먹었다.

초창 당시 총부생활은 굉장히 어려웠다. 물론 일제하의 우리 국민이 당하는 수난이기도 했지만 창업의 역사 속에 감내해야 하는 하나의 시련이었을 것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그래서 식욕도 대단한 청·장년기 사람들이 식사 때가 되면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분배되는 밥그릇 외에 한 그릇쯤 밥상 밑에 감추어 두었다가 먹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감원에게 들켜 그 밥을 먹지도 못하고 빼앗기는 수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런 생활에서도 대종사는 언제나 대중들과 함께 대중식사를 했다. 어느 해 늦가을 김장철, 총부 대중이 동원돼 무와 배추 다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종사가 양혜련에게 말했다. "무 잎사귀를 손으로 잡고 꼬리 부분부터 거꾸로 깎아라." 양혜련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대개 무는 머리 부분부터 깎아서 맛있는 부분을 먼저 먹고, 꼬리 부분은 나중에 먹거나 맛이 없으면 버리는 것인데, 꼬리 부분부터 먼저 깎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대종사는 양혜련이 거꾸로 깎아주는 무를 받아들고 말씀했다. "대개 사람들은 맛있는 머리 부분부터 먼저 먹는다. 그러나 맛없는 꼬리 부분부터 거꾸로 먹으면 계속해서 더 맛있는 것을 먹게 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젊어서 고생을 먼저하고 뒤에 기쁜 일을 맞이하게 되면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젊어서 행복하게 살다가 갈수록 어렵게 되면 고통이 커진다. 고진감래의 진리를 잘 알아야 한다."

대중들 밥 먹느냐

박성경의 회고다. 일제 말경에 총부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대중들의 식생활이 문제였다. 만일 식사 종이 울리지 않으면 정산종사가 걱정하니 여전히 식사 종을 쳐도 식당에 올 필요는 없으니 오지 말라는 연락을 하게 됐다. 식사 종으로 식사시간을 알리는데 먹을 것이 없어 굶게 될 때는 식사 종을 칠 필요가 없었다.

박성경은 밥상을 가지고 조실 정산종사에게 갔다. "대중들 밥 먹느냐?" "예" "그래, 반찬 없이도 먹는구나." 며칠 후 교단형편이 간고해 대중들이 굶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정산종사가 그대로 식사를 밖으로 내놓아 버렸다. 그리고 박성경을 꾸짖는다. "이 철없는 것아, 너희 젊은 것들을 굶기고 내가 밥을 먹으면 쓰겠느냐? 언제든지 사실대로 말해라." 그 후로 대중들이 말간 죽이라도 먹어야 정산종사도 식사를 했다.

유일학림 1기생들이 공부할 당시 총부는 학원생 공부시키는 데 힘을 기울이며 아침은 꽁보리밥에 점심·저녁에는 밀기울에다 고구마를 넣고 죽을 끓여 먹었다. 또 건강을 잃은 동지들이 많았는데 조실에 진지상을 올리면, 정산종사는 조금 먹은 후 동지들을 위해 진지 그릇을 내주곤 했다. 생선 한 토막이라도 올리면 몸이 약한 동지를 생각해 내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혜선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정산종사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에는 젓가락을 들기도 불편해 비빔밥을 자주 먹었다. 그럴 때면 정산종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촌사람이라 얌전내고 먹는 것보다 쭈물쭈물 무치고, 된장국 삼삼하게 끓이면 좋더라."

정량먹고 일하는 것도 공심

교당생활도 간고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선진들의 생활 역시 굶주림에 시달렸다.

원기27년 서대인이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서대인은 40리길인 만덕산까지 가서 쑥을 캐다가 죽을 끓였다. 때로는 도토리로 끼니를 이으면서 길쌈을 했고 허리끈을 졸라매며 한 푼 두 푼 모았다. 마령 시골에 처음 전기를 가설할 때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시설비를 충당해 전기가 켜지던 날은 신기하고 기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초창기 신도안 삼동원 살이는 식사 또한 험악했다. 아침에는 시래기밥이나 무밥, 점심밥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감자나 옥수수로 때웠으며 저녁에는 서숙죽을 먹었다. 일요일 점심 때는 대산종사가 교도들로부터 들어온 과일과 과자 등을 모아놓았다가 내놓곤 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특식이었다고 한다.

이운권의 회고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 총부 식구들은 콩깻묵으로 죽을 끓여서 끼니를 때웠다. 젊은이들은 위에 뜨는 맑은 물 은 걷어내고 뒤에 남은 찌꺼기를 먹게 되니 그 기아의 고통도 이겨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나는 그 죽을 먹고 제사를 지내고 나면 너무나 많은 땀을 흘리게 되어 생각하던 끝에 죽을 먹지 않고 지내면 땀이 안 날까 하여 3일을 계속 저녁을 먹지 않고 했더니 허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선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다양하다. 부산 천기덕 도장에서 레슬링을 한 힘 좀 쓰는 김정준이 수계농원에 들어왔다. 그는 허기가 져 도저히 못 살겠다며 식량 담당인 박달식에게 윽박질렀다. "식량 됫박 좀 싹싹 깍지 말고 내라."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다. 박달식은 식사 때마다 정준의 밥그릇에 한두 수저씩 자기 밥을 덜어 줬다. 이것이 김정준에게 무언의 감화를 주었다. 김정준은 차츰 농원에 적응하게 되면서 식량을 적게 내는 것도 공심이고, 정량 먹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공심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됐다.

또한 요즘이야 깻잎이나 고춧잎으로 만든 밑반찬이 웰빙 음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던 시절 그것들은 서민들의 식탁에 물리도록 오르내린 '가난의 상징'이었다. 당시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서원관(기숙사)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봄날, 기숙사생들이 고추밭에 모종을 옮겨 심는 울력에 나섰다. 울력을 하다 말고 밭두렁에 앉아 고추모종을 보며 한 학생이 말했다. "고추나무야, 제발 고춧잎은 열지 말고 고추만 열그래이! 고춧잎은 묵고 싶지 않다."

원광대학교 김도공 교무는 그의 논문 〈원불교 음식문화의 종교적 함의〉에서 "원불교 음식문화가 형성되게 된 역사적 배경으로는 원불교의 탄생 당시 한국사회와 한국불교의 시대적 배경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제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따른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원불교의 음식문화를 법도로서 규정하고 있는 〈예전〉 가례편을 보면,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는 사안이 있다. 과도한 음식과 형식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용의 절약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가례에서 아껴진 비용을 보다 의미 있는 활동에 기부하고 활용하기 위함이 그 근본 목적임을, 우리는 선진들의 음식문화에서 절실히 깨닫게 된다.

자료 참조 〈원불교예화집 1~10〉 서문 성 편저

원불교 음식 문화는 시대적 상황이나 초기 간난했던 사정으로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10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기간과 이해가 온전히 가능한 기록이라는 장점에서 보면 발췌나 그 정확도는 높다. 원불교100년을 맞아 교사와 예화 속 음식에 대한 기록을 통해 교단 초기의 근검절약 정신과 공사를 분명히 했던 선진들의 자세,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낸 방언공사 정신을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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