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3

▲ 김보신 원로교무
서광주교당에서 장흥교당도 냈다. 3년간 비포장도로를 3시간씩 다녔다. 서광주교당 회장이 판사였는데 장흥 '지원장'으로 오게 됐다.
나는 "아무래도 뜻이 있어 장흥으로 좌천되어 온 것 같습니다. 이차에 장흥에 교당 하나 내십시오"라고 권유했다. 이에 회장님은 박의준 주무님과 합심하여 장흥교당을 냈다.

진안교당에선 원기50년부터 7년간 살았다. 당시 교도회장이 주조장을 했다. 회장의 신심이 얼마나 장한지 4축 2재 행사 등이 있을 때마다 음식을 수레에 싣고 와 공양하곤 했다. 진안에서 안천교당(주천교당 전신)과 무주교당을 연원교당으로 창립했다.

당시 진안군은 교통이 무척 좋지 않았다. 진안 주무의 친정이 무주였다. 그 분 언니 아들이 열반하고 며느리와 함께 살았는데 며느리는 교회에 다녔다.

나는 주무와 함께 무주로 출장다니기를 3년을 했다. 그리고 교당으로 할 작은 집을 샀다. 헌 집을 사서 고쳐내니 나를 가리켜 '박사'라고도 했다.
안천교당은 면사무소를 매입해 교당 터로 삼은 게 시작이었다.

면사무소의 원래 주인 아들이 나이 서른에 열반해 며느리를 살게 하려고 면사무소를 샀다. 그런데 며느리가 다른 곳으로 재가하였기에 면사무소가 교당 터가 되었다. 그 아들의 초상을 치를 때 눈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차도 다니지 못했다.

나는 복이 많아 하는 일마다 성사되었다. 아무래도 호적명이 복전(福田)이라서일까.
여수교당으로 오던 해, 대산종사가 "남해에 교당을 내라"고 했다. 나는 남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성사시킬까' 고민하던 찰나에, 마침 송천교당 주무 유수안 교도가 여수교당을 찾아와서는 "남해에 가려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남해가 친정과 시댁이었다. 유수안 주무에게 교당을 내야 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니 가만히 듣고 아무 말 없이 갔다.

얼마 후 주무님의 동생인 여수교당 교도 유연덕에게 소식이 왔다. '두 분이 함께 전셋 집을 얻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두 분의 발원으로 전셋집을 얻기로 했다.

당시 남해는 집이 없었고 인연 만나기 또한 힘들었다. 다행히 유수안 교도의 친구가 남해에서 '금애당 약방'을 하고 있었다. 남해 유지로 덕인이었다. 우리가 남해에 갔을 땐 부산 출장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 그 후 약방 주인이 열반하여 영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교당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만나지 못한 약방 주인을 부르며 "금애당 약방 주인 영가시여! 원불교를 남해에 교화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길이 열리겠냐"고 하며 열반독경과 발인식을 다 올렸다. 그리고 유 주무와 함께 초와 향 등을 챙겨 집으로 찾아가 문상을 했다.

미망인은 매우 덕성스러워 보였다. 부인을 만나 "천도재를 지냈습니까?"하고 물으니 스님들이 와서 천도식은 하고 갔으나, 천도재는 붙이지 않았다고 했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그냥 안 했어요"라고 했다. 난 자연스럽게 원불교 천도재를 지내자고 권유했다. 그렇게 3재부터 상주들과 함께 재를 지내며 50명을 입교시켰다. 그 후 남해교당으로 교화를 하러 다녔는데 버스로 8시간 걸렸다. 여수교당 교도들은 "교무님이 증발해 버렸다"고 할 정도로 바쁜 교화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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