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빛내는 〈정전〉

며칠 전 태풍의 영향으로 밴쿠버 도처에 나무가 부러지고 전선이 끊기면서 정전이 되고 신호등이 꺼져서 교통정체가 이어졌습니다. 갑작스런 정전은 이미 너무나 전기 의존적인 현대인이 어두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했죠.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것 하나 내 힘만으로는 되지 않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먹고, 입고, 살고, 사용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타인이나 다른 생명에게서 제공된 것들입니다. 심지어 산소나 물, 햇빛 등은 없으면 아예 생명을 이어가기가 어렵죠.

원불교에서는 이렇게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를 사은으로 제시합니다.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은혜로운 존재들이죠.

생각해 보세요. 하늘의 공기와 땅의 바탕, 해와 달의 밝음과 풍운우로(風雲雨露)의 혜택, 생멸 없는 천지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될까요? 하늘과 땅이 없고, 깜깜한 어둠 속에 숨조차 쉴 수 없으며, 마실 물도 없고 일용할 양식이 되는 식물이나 동물조차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상상도 안 되죠. 다행히 우리는 거대한 천지 자연 덕분에 무한히 제공되는 땅과 공기와 빛과 물과 각종 산물의 은혜로 생명을 보전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낳고 기르고 보호하며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가르쳐 인류 사회로 지도해 주신 부모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태어나지도 못해 허공을 맴돌고 있을 수도 있고, 태어났다고 해도 사람 몸을 받지 못해 축생의 몸으로 부자유할 수도 있죠. 다행히 사람 몸을 받았다 해도 부모님의 애정어린 보살핌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교육이 없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라기는 어렵습니다. 이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성장하면서 댓가를 지불하며 스스로 배우게 되죠. 정말 일생을 통해 부모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부모에게 너무 무심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직업으로 가르치고, 의식 원료를 제공하며, 각종 물품으로 살 집과 수용품을 공급하고, 천만 물질을 교환하여 우리 생활에 편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너무나 익숙해서 둔감하지만, 우리 삶은 세계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죠. 뿐만이 아닙니다.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섭취하는 매일의 식사에는 뭇 동식물의 생명이 녹아들어 있죠.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입니다. 엄청난 희생과 은혜에 큰 빚을 진 셈이죠.

또한 종교와 도덕으로써 인생의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성자들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을 보전시키고 지식을 함양하게 하는 사농공상의 기관을 설치하고 지도 권면에 전력하게 하는 법률이나 우리가 평안히 살 수 있도록 시비이해를 구분하여 불의를 징계하고 정의를 세워 안녕질서를 유지하는 법률의 은혜가 없이도 우리의 삶이 가능할까요?

이처럼 우리는 내 힘으로 사는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주어지는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사은의 큰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 은혜나 도움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죠.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삶의 태도에 변화가 생깁니다.

어떻게 하면 그 은혜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며 살 수 있을까요?

<밴쿠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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