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귀중히 알고 밥을 귀중히 알라'

▲ 소태산 대종사는 들판에 나 있는 쑥 조차도 피해 걸으며 다녔다. 어려울 때 양식이었던 은혜를 언제나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종사는 쌀(밥)에 사은의 은혜가 모두 담겨있다고 가르쳤다.
이번에 소개하는 '일화 속 밥상'은 음식에 얽힌 소태산 대종사 일화를 중심으로 엮어봤다.

밥을 귀중히 알라

요즘 어린이 인성교육 차원에서 대두되는 '밥상머리 교육'은 무엇보다도 음식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예의를 지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가족이 해체되고 음식이 풍족해지면서 세대가 지날수록 밥상(음식)의 소중함을 잊기 때문이다.

〈원불교 교전〉에는 많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일화 속에서 소태산 대종사가 음식에 대해 매우 각별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때로는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음식의 소중함을 설명하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원불교 초창 당시에 한 제자가 쌀을 키질하다 실수로 쌀을 흘렸다. 대종사께서 쌀을 주우며 제자들에게도 쌀 한 톨 한 톨을 줍도록 하며 "농부의 피 땀 어린 것을 함부로 하면 장래에 빈천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곡식이 썩고 있으면 다 썩을 때까지 농신이 앉아 울고 있다. 쌀을 귀중히 알고 밥을 귀중히 알라"고 말씀했다. 우리의 주식인 쌀과 밥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일러준 대목이다.

또 대종사는 들판에 널러있는 쑥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대종사는 언젠가 부산지방에 내려가 남부민 교도 소산 박허주와 함께 시내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쑥이 많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종사는 쑥을 밟지 않고 피해서 걸으며 "나는 쑥을 밟으면 송구스럽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피해서 걷는다. 가난하게 살면서 봄철 양식이 없으면 쑥을 먹고 살았다. 그래서 쑥이 소중하게 느껴져 함부로 밟지 않는다"고 말했다. 음식은 물론 무엇이든지 부족하고 없던 그 시절에는 보릿고개라는게 있었다. 보릿고개는 춘궁기(春窮期)기로 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을 말하는데 농가생활에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고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 어려운 시절에 주식으로 먹었던 쑥에 대한 대종사의 마음을 엿보게 해 준다.

밥 한그릇의 의미

밥 한그릇에는 얼마만큼의 무게가 담겨있을까. 대종사에게는 어려운 시절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다행으로 여겼고, 밥 한 그릇은 법신불 사은의 의미가 들어있다고 했다. 다음은 대종사가 밥과 음식에 대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난 법문 일화다.

경성(서울)지부에서 대종사는 허름한 식당채 짓기를 원하는 낙타원 김삼매화에게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지금 우리 국민들의 생활형편이 어떻게 생겼는데, 비록 누추하지만 이런 방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큰 다행으로 알아야지. 집도 없이 추운 만주 벌판에서 유랑하는 동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을 하나. 그 뿐인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고국을 그리며 찬 이슬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돼"라며 경책했다.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고 감사해야 할 일일 뿐만 아니라 굶주리는 동포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함께 있던 충산 정일지에게도 음식의 소중함을 묻는다. "나는 회상을 편지 이십여 년이 되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밥을 무심히 대한 일이 없었다. 이 밥을 먹고 내가 오늘은 이 세상을 위하여 무슨 유익한 일을 할 것인가? 오늘 하루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했는가? 나는 이 한 그릇의 밥을 먹기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가? 늘 반성하고 대조한다. 그런데 일지는 어떠한 심경으로 밥을 먹는지 사실대로 이야기해봐."

밥 한 그릇 먹는 데에도 자신의 하는 일을 대조해 본다는 대종사의 말에 정일지는 법 방망이를 크게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대종사는 "밥 한 그릇이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한 숟갈의 밥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봐라. 천지·부모·동포·법률의 큰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밥 한 그릇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한 그릇의 밥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고, 밥을 만들어 준 사은님께 감사보은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처럼 소중한 밥을 먹고서 몸을 움직이고 행동 한 번을 할 때에 어찌 무의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란 팔 다리 한 번 움직이고, 말 한 번 할 때에도 이 세상을 위해서 가치 있는 봉사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정일지는 앞으로 '밥값 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했다.

음식은 질보다 마음

대종사는 당신을 위해 공양을 지어올리는 제자들의 마음을 모두 헤아렸다. 음식의 질보다는 그 갸륵한 마음을 높이 샀던 것이다.

어느 날 시골에 사는 한귀지화 교도가 고구마를 쪄서 품에 안고 와서 대종사에게 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와서 생각해보니 대종사께 올리는 음식치고는 고구마가 하찮은 음식이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가져다 드리지 못하고 시자를 통해 여쭈기만 했는데, 그 마음을 안 대종사는 "이 무슨 소리냐? 얼마나 주고 싶어 가져왔겠느냐? 골마리(허리춤)에 가져와 더 맛있겠다"하고 보는데서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다음 일화도 어느 선진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동·하선 훈련이 있던 당시에는 회원들이 음식을 서로 해오곤 했다. 특히 대종사도 함께 하는 자리라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새댁이었던 절타원 탁보신갑은 영산교당에서 열리는 동선 저녁 공부시간에 참석했다. 탁보신갑은 뭔가 맛있는 음식을 대종사와 동지들에게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던 터라 여기저기 집안을 둘러보아도 가난한 곳간엔 올릴 만한 먹거리가 없었다. 어느 날 곳간을 살피던 탁보신갑은 문득 눈빛이 텃밭을 향했다. 이엉을 얹어 덮어 둔 무 구덩이를 본 것이다. 신이 난 탁보신갑은 신이나 땅속에 무를 서너 개 꺼냈다.

무를 깨끗이 씻은 후 마른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 얼마나 닦았는지 무는 반짝반짝 윤이 났다. 그날 저녁 탁보신갑은 보자기에 싼 무를 들고 교당으로 향했다.

공부가 끝나고 회원들은 가져온 곶감이며 산자 등 맛있는 음식을 대종사께 올렸다. 그걸 본 탁보신갑은 갑자기 주눅이 들고 부끄러워 변변찮은 무를 차마 내놓지 못하고 옆에 있는 보자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대종사는 "어디 탁보신갑이 가져온 것 좀 내놔 봐라"하고 말했다. 얼굴이 빨개진 탁보신갑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무보따리를 대종사께 올렸다. 대종사는 "어서 풀어 봐라"고 독촉했다. 마지못해 탁보신갑이 보자기를 풀자 뽀얗게 목욕을 한 먹음직스런 무가 속살을 드러냈다. 대종사는 "오늘은 탁보신갑이 가져온 무로 대중공양을 하자"하고, 그 자리에서 깎아놓은 무를 "어어 시원하다"며 맛있게 먹었다. 부끄러워하던 탁보신갑의 입가에도 흐뭇하게 미소가 번졌다.

소태산 대종사의 일화를 통해 본 '음식과 밥상'은 귀중한 생명처럼 다가온다.
원기100년을 앞둔 우리들이 '음식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는 대종사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원불교 음식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먼저 풀어야 할 숙제다.

원불교 음식 문화는 시대적 상황이나 초기 간난했던 사정으로 풍부하지는 않다. 그러나 100년이라는 비교적 최근의 기간과 이해가 온전히 가능한 기록이라는 장점에서 보면 발췌나 그 정확도는 높다. 원불교100년을 맞아 교사와 예화 속 음식에 대한 기록을 통해 교단 초기의 근검절약 정신과 공사를 분명히 했던 선진들의 자세, 어려움 속에서도 이뤄낸 방언공사 정신을 되새겨본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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