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타원 노덕송옥 선진

현타원 노덕송옥(賢陀圓 盧德頌玉, 1859∼1933)은 대산 김대거 종사의 조모이다.
어린 손자를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인도하여 종법사의 중대한 역할을 하도록 한 인물이다.

노덕송옥은 남원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인자하고 순진하며 매사에 거짓이 없고 정직하여 총애를 받고 자라나 16세에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로 시집을 갔다. 3남2녀를 두고 다복한 생활을 했으나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하고 구도에 뜻을 두었다.

때마침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 두 번째 행가를 하신다.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후였다. 삼타원 최도화의 인도로 노덕송옥은 대종사를 친견한다. 66세의 나이였다. 이 때 장손자인 김대거를 데리고 간 것이다. 이후 5월 한 달에 걸쳐 열린 선(禪)에 참여한다.

신심이 난 노덕송옥은 총부 선방에 내왕하면서 낙도하는 한편 가족들을 정법회상에 인도하고 자택에 교무를 모셔다가 법회를 여는 등 교당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현타원은 사업심이 출중하여 차를 탈 일이 있어도 걸어 가고, 육신 근로로 푼 돈을 모으는 등 근검저축으로 교중 사업에 협조를 했다.

한 때도 교도 의무금을 어기지 않고 기일내에 헌공하기 위해 찬 바람에도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진안 좌포에서 익산 총부까지 직접 가지고 옴에 여러 동지들이 그 법규 준수의 철저한 정신과 알뜰한 공심에 감탄했다.

노덕송옥의 이러한 신앙적 삶의 모습은 불법연구회 〈회보〉제4호에 혜산 전음광이 쓴 '슬피 노덕송옥 선생의 가심을 추억함'이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노덕송옥이 원기18년(1933) 75세에 열반하자 전음광이 추모의 글을 쓴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를 향한 노덕송옥의 신성은 지극했다. 그의 신성을 드러낸 대종사의 말씀이 〈대종경〉 신성품 15장이다.

"내가 오늘 조실에 앉았으니 노덕송옥의 얼굴이 완연히 눈 앞에 나타나서 얼마동안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보았노라. 그는 하늘에 사무치는 신성을 가진지라 산하가 백여 리에 가로 막혀 있으나 그 지극한 마음이 이와 같이 나타난 것이니라."

노덕송옥은 총부에서 선이 열릴 때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참예하여 법열에 젖었다. 대종사가 설법을 할 때에는 전삼삼, 최도화 등과 더불어 일어나 무수히 예배를 올려 무상의 법흥을 돋구었다.

며느리 봉타원 안경신(鳳陀圓 安敬信)도 효심이 장하고 신심이 깊어서 시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이 공부 이 사업에 정성스러웠다. 봉타원 대희사(대산 대원정사의 모친)가 공부에 재미를 느껴 마음이 커지는 기쁨을 말한 것을 당시 마령교무로 좌포출장소 출장법회를 보던 구산 송벽조가 기술, '좁든 마음이 점차로 커지는 나의 즐검'이란 주제로 〈회보〉 제25호(원기21년 6월호)에 실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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