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5

▲ 박혜순 원로교무
원기29년 11월 수지교당에서 정양선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감타원 박혜순(坎陀圓 朴慧順) 원로교무는 원기38년 장수교당에서 간사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고향에서는 '출가를 하겠다'고 하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산 박장식 종사와 곤타원 박제권 종사 등 훌륭한 어르신들이 많이 출가를 했기 때문이다.

유일학림 다니는 상산님이 방학 때면 고향 수지에 오셨다. 마치 신선들이 사는 세계에서 오신 것처럼 성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출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리강습에 참여하기 위해 교당에 이불을 가져다 놓고 자면서 한문을 배웠다.

향타원 박은국 종사가 수지교당에 와서 '부모은'에 대해 교리강습을 한 적이 있다. 마음 쏙- 들어왔다.

지금도 그때 당시의 향타원님 인상이 기억되고 있다. 법문도 잘하셨고, 즉석심고도 잘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내 마음에는 정신의 어머니로 모시고 있다.

장수교당에서 근무할 당시 교무님은 오종태 선진이었다. 돌아가신 대지화씨도 함께였다.
교당 교리강습을 할 때 정광훈 선진이 오셨다. 입교 연원인 정양선 선진이 중산님의 누님이셨다.

중산님은 나를 총부 교무부로 불러 서기로 근무하게 했다. 이후 "초량교당으로 가라"고 하셨다. 초량교당은 감원도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작은 선생이라 했다. 그때는 머리를 올리고 간사 근무를 했다. 초량에서 3년간 향타원님 모셨다.

향타원님에게 수도인의 심법을 다 배웠다. 정신적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교도 중 칠보화님이 계셨는데, 잘 살다가 생활이 어려워졌다. 딸을 데리고 교당에 와 계셨다.

그 딸은 어려서 나를 애 먹이곤 했다. 그 애하고 나하고 이러고 저러고 하면 향타원님은 나를 혼내셨다. 그 딸로 인해 속상한 일도 몇 번 있었다. 향타원님이 그 애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타일렀다. 내 말은 잘 안 들어도 향타원님 말은 잘 들었다.

또 한 번은 키우던 개가 화단에 있는 아스파라거스를 다 물어 뜯었다. 귀한 야채라서 아끼셨는데, 개가 그랬다. 나는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다.

향타원님은 그렇게 고집 부리고 밥 안 먹을라면 나가 있으라고 야단도 맞았다. 향타원님과 한 방에서 자기도하고, 가운데 방에서 생활하기도 하면서 3년을 근무하고 학교로 왔다.

학교 졸업 후 첫 발령은 서울교당이다. 그때는 부교무가 아니라 순교였다. 졸업하고 서울로 가기 싫어서 마구 울었는데, 승타원 송영봉 선진님이 오셔서 달래서 함께 갔다. 어린 마음에 서울은 좀 복잡하고 벅차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서울교당에 근무하면서 승타원님 속을 많이 태웠다. 날이 더우니 전차 타지 말고 택시를 타고 가자고 조르기도 했다.

또 청년법회를 보라고 하셨다. 나는 학생법회는 잘 보지만 청년법회는 죽어도 못 본다고 다락방에 가서 숨어 버렸다. 초량교당 간사 근무할 때는 어른 교무님들이 훈련 가시고 안 계실 때 부산진교당과 서면교당 가서 법회도 보고 그랬다.

서울교당에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서울에서는 일이 많았다. 교당 위쪽 담이 없어서 담을 쌓기도 했다. 위에 살던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면 담이 없어 교당에 쌓았다.

결국 승타원님의 건강으로 이동을 하셨다. 나도 3년 근무하고 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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