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아이들도 우리와 똑같아
키툴루니 훈련원, 지역 공헌
아이들과 마을에 큰 영향 줘

▲ 이은영 교도 / 사단법인 한울안운동
13개월간의 케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온 지, 어느덧 6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리고 지난달 나는 다시 한 번 봉사단원이 아닌 모니터링 팀원으로 케냐를 방문했다. 모니터링을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며, 처음 키툴루니 직업훈련원에 가던 날의 걱정 어린 내가 생각났다.

'낯선 나를 반겨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잔뜩 긴장해 있던 내게 아이들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금세 친근해졌다.

막상 그들을 만나고 보니 케냐 아이들도 내가 중·고등학교 때 했던 고민과 생각들을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이성 친구 질문에는 까르르 웃으며 쑥스러워하는 모습, 시험을 걱정하는 모습,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희망에 찬 모습 등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우리나라 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았다. 그렇게 다양한 꿈과 희망을 가진 학생들을 보며, 키툴루니 직업훈련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때로는 답답함과 조급증을 느낄 때도 있었다. '지난 주 미팅 때 설명했는데, 왜 이해하지 못하지?', '몇 번이나 더 설명해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함께 이야기하고 일을 진행하다 보면 내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사실 그들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님을 알게 됐다. 단지 나와 경험이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커피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내게 누군가 무작정 커피나무를 그려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아마 난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내가 바랐던 것도 이와 같았다. 오로지 내 경험을 기준으로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요구하고, 이루지 못하면 답답해했다. 그러던 중, 처음 겪는 문화 속에서 사고뭉치 어린아이가 된 나를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그들이 떠올랐고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는 답답함을 느끼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 후로는 반복해서 설명하고 또 설명하는 과정이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봉사단원이라는 이름으로 일 년을 지냈지만 돌아보니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욱 많은 시간이었다. 케냐의 언어도 몰랐던 내가 무언가를 주겠다고 한 생각 자체가 참 거만한 자세였다.

그들은 결코 우리보다 모자라거나, 불쌍하거나, 혹은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주어진 환경과 국가가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족한 자원에 대해 결코 탓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가지고 자랐던 나는 늘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환경 내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늘 웃음과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았다. 그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부정적이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렇게 케냐에서의 경험은 나의 가치관까지도 변화시킨 소중한 시간이었다.

모니터링을 위해 다시 찾은 케냐는 나를 잊지 않고 반겨주는 마을주민, 학생,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다시 만나 이야기하면서 원불교여성회 한울안운동이 그곳의 학생, 교사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교육의 의지는 있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는 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짐으로써 아이들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

처음 아이들을 만났을 때 꿈을 물어보면 대부분이 막막해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이 이제는 웃으며 자신의 미래를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부모들도 아이들을 보면 희망을 꿈꾸게 됐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곳에 키툴루니 훈련원을 통해 전기가 공급받게 됨으로써 마을과 시장의 움직임이 활성화됐다. 키툴루니 훈련원 하나가 아이들을 변화시키고, 그곳에서 꿈을 키우는 아이들로 인해 그들의 가정이, 마을이 변해가고 있다.

화선지 위에 먹물이 번져나가듯 아이들의 희망이 커지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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