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6

▲ 박혜순 원로교무
서울교당 이후 부임한 곳은 부안교당이다. 3대 교무였다.

당시 부안교당은 일도 많고 빚도 많았다. 나는 교당 문간채를 팔아서 돈을 합하고, 교도들과 계를 했다. 박상윤 덕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채소를 잘 가꿔서 팔고, 대밭에서 죽순을 캐서 팔고 그렇게 빚을 다 갚았다. 그리고 계를 해서 기금을 마련했다. 7년을 나와 함께 고생해 준 박 덕무님이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원평교당에 부임했다. 현상유지를 하며 살았다.

당시 대산종사님도 오셔서 2년간 한옥 건물에서 기거하셨다. 그리고 현재 압구정교당으로 갔다. 압구정교당은 부산진 주무님의 연원이다. 부산 초량에서 간사할 때, 향타원님 잘 모신다고 나를 딸처럼 생각해 주신 분이다.

주무님 부군이 교당 낼 것을 염원하셔서 당시 영동교당(현 압구정교당)이 된 것이다. 당시 영동에는 공무원 아파트가 있었다. 그때는 영동지역에 신호등도 없고 길만 나 있었고, 국민주택을 분양할 때였다.

주무님이 당시 돈 100만 원을 주셔서 2층집 전세를 얻어 교화를 시작했다. 1층은 콩나물 공장이었다. 2층에는 주방시설이 없었다. 건물 앞에다 연탄을 걸고 밥을 해 먹었다. 연원교당인 원남교당에서 숟가락 등 양식을 해주셨다. 방석은 20개를 주셨다.

간판을 걸어 놓으니 여기저기서 주일마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대구 등 지방에서 이사 오신 분들이 주말마다 교당에 왔다. 집이 좁을 정도로 참 재미있게 교화하며 살았다.

2층 마루에 앉으면 방에 있던 법신불이 가려질 정도로 열악했다.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었는데, 설교할 때는 교도들이 벽에 가려서 고개를 빼꼼하게 빼서 나를 보았다.

그래서 다시 2층집으로 이사를 갔다. 1층은 우유배달점이라 많이 시끄러웠다. 그렇지만 2층이 툭 터져서 법회 보기에는 좋았다. 그곳에서 교화를 활발하게 시작했다. 현재 영동백화점 옆이었다.

당시 교당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쓰레기장 옆에 얼음집이 있었다. 거기다 김치를 두고 사람이 안 볼 때 김치를 내다 먹고 다시 갖다 놓곤 했다. 그곳에서 기운을 타서 사람이 많이 불어 어린이 법회도 봤다. 당시에는 간사도 2명이나 함께 살았다.

교화가 활발해져 교당 할 집을 매입했다. 지금 영동백화점 뒤였다. 그 집 사는데 교도들이 윤광준 교도와 정 선생이라는 교도가 집을 담보를 잡혀 줬다. 교육 보험에 다니는 신현대 교도가 교육 보험도 해줬다. 그렇게 융자를 받아서 교당 할 2층 집을 산 것이다. 그렇게 활발하게 교화하며 9년을 근무하고 이동을 했다.

영동교당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곳이다. 그 돈 100만원이 종자돈이 돼 교당이 된 것이다.

원남교당에 계시던 승타원님이 미국으로 가시고 향타원님이 부임해 오셨다. 나는 한결 수월했다. 필요한 것을 원남교당에서 가져다 먹고 살았다. 당시 종로 4가에서 을지로 4가까지 걸어가서 288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 한번 타려고 걸었던 것이다. 법회 볼 때는 2층이 교도들로 가득 찼다. 교화의 꽃이 활짝 피었다.

매주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 이화여대생만 8명이었다. 9년의 영동교당 교화를 마감하고 목포교당으로 이동했다. 목표에서도 교화는 그런대로 되었다. 교구로 승격도 됐다.

현장에 있을 때는 퇴임하면 실컷 정진 적공 해야지 하는 그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대 마음대로 안된다. 그래서 젊어서 수양하고 적공하라고 하셨나 보다하고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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