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마땅히 주함이 없이 행해야 하느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로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양으로도 숫자로도 테두리도 없는 중생을 다 멸도 시킨다는 부처님의 원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공부란 바로 원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실지에 있어서는 멸도 된 중생이 아무도 없다고 부정하신다. 하였되 한바가 없다는 것은 바로 무상(無相)을 말하는 것이다. 멸도를 시켰는데 마음에 내가 멸도를 시킨 것이 남아 있으면 그것이 착심이다.

처음 금강경을 벼락경이라고 설명하였고 그 벼락을 나에게 쳐서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내가 없는데 멸도 시키는 사람과 멸도 될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셨다. 48년간 중생을 위해 교화를 했지만 마음속에 뭔가 하였다 하는 한 티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예수께선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주여!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다. 예수는 최후의 순간에 하느님의 아들 됨을 부정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념을 깨부수는 것이다.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상(四相)이 남아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 공부법에 상(相)이 남아 있는지를 매일 점검하는 것이 일기법에서 심신작용처리건이다.

스스로가 심신작용을 어떻게 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또한 견성이다. 이렇게 벼락으로 나를 깨부숴 무아(無我)로 만들고자 하는 부처님의 핵심사상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여기 담겨 있다 하겠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4장은 묘행무주분(집착이 없는 실천)이라고 한다. 묘(妙)자는 진공묘유의 줄임말로 본다면 진공한 가운데 묘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를 조화라고 한다. 조화란 기(氣)의 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우주에 충만한 기가 묘하게 나타난 것은 우주가 참으로 비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었다는 것은 사상(四相)을 떼고 무아(無我)가 되었다는 것으로 불교의 수행 방법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밀에 비유하자면 선정에 해당 한다. 무주(無住)란 주함이 없다는 뜻으로 묘행무주란 주함이 없이 진공묘유의 행을 하라는 말이다. 조금 멋지게 표현하면 "아름다운 행동은 집착이 없다"라고 하겠다.

復次須菩提야 菩薩은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또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마땅히 주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법(法)은 소승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를 뜻하고 있다. 존재에게 주(住)함이 있는 보시를 유루(有漏)보시라고 한다. 하지만 보살은 업이 쌓이는 유루보시가 아닌 주함이 없는 무루보시를 하는 것이다.

지금 경주 새등이문화원에 전통한옥을 짓고 있다. 현재 많은 교도님들이 건축불사에 작은 힘이나마 헌공금을 내고 있는데 돈을 내고도 마음에 흔적이 없을 때 보살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시는 크게 삼시(三施)로 나뉘는데 재물로 하는 것, 법문으로 하는 것과 무외시(無畏施)로 생사대사를 해결하여 두려움을 없애 주는 보시가 있지만 〈대종경〉인도품 17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보시를 하고도 만약 흔적이 남게 되면 도리어 복이 화(禍)로 바뀐다고 대종사님께서 경계하셨다.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이른바 색에 주하지 않고 하는 보시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부딪침과 법(法)에 주하지 않고 하는 보시니라." 육근(六根)을 통해 육경(六境)이 있는데 경계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을 육식(六識)이라 하는데 이를 합쳐 18계라고 한다. 18계의 작용으로 진성(眞性)이 더럽히는 것을 육진(六塵)이라 하며 보살은 18계 모두가 공(空)함을 이루는 보시를 한다는 것이니 "너희들도 마음을 그렇게 써라"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須菩提야 菩薩이 應如是布施하야 不住於相이니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시를 하더라도 밖으로 티내지 않고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何以故오 若菩薩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어찌한 연고인고? 만일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아니하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가히 사량하지 못할지니라."
그래서 상을 내지 않고, 표시를 내지 않고, 티를 내지 않고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이 사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량없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들은 인과적 사고(思考)를 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고액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냥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전생에 다 지은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다. 인과의 이치는 소소영령하기 때문에 인과를 믿는 사람은 지금 당대만 생각하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하고 행동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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