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 기념 행사가 10월3일 평양 인근의 단군릉 앞에서 진행됐다. 단군제와 함께 북한의 단군민족통일협의회와 남한의 개천절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는 단군민족의 뭉친 힘으로 전쟁위험제거 평화적 환경마련,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북관계를 신뢰와 화해의 관계로 전환시켜 나가자는 남북공동호소문을 발표했다.

행사가 열린 북한의 단군릉은 1993년 단군 유골 발견과 함께 1994년 10월11일 평양 강동군 강동읍 서북쪽 대박산 기슭에 개건한 곳이다. 2014년에는 단군릉 개건 20주년으로 개천절 남북공동행사가 9년 만에 열리기도 했다.

1993년 10월 개천절을 앞두고 북한은 단군 유해 발굴 소식을 전했다. 평양 강동지역에 발굴한 단군릉은 석조로 된 고구려양식의 무덤으로 관을 안치한 무덤칸은 가로 2백73cm, 세로 2백76cm이고, 천장은 1백60cm이다. 무덤칸의 바닥에는 3개의 받침이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뚜껑돌이 덮여 있다. 단군릉이 고구려양식인 이유는 고구려시대에 무덤을 개축했기 때문이다.

단군릉 안에서 남녀 한 쌍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금동띠 표쪽, 여러 개의 도기 조각, 관에 박았던 관못 등이 출토됐다. 남자의 유골은 골반뼈를 기초로 감정한 결과, 170cm의 키로 추정됐다. 북한은 해당 유골을 연대측정한 결과, 약 5천 11년 전 것으로 단군의 유골이 확실하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신화 속 인물이 실제 역사로 바뀐 순간이었다.

발굴 1년만인 1994년 10월 11일에 개건된 단군릉은 18층 건물에 해당하는 70m 높이에 아랫부분은 한 번이 50m, 높이는 22m인 9층의 계단식 무덤으로 1994년 준공된 것을 기념해 총 1994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피라미드형이다. 단군릉 발굴로 단군신화는 고조선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통치수단의 하나였고, 주체사관과 결합하면서 민족 통합의 긍정적 문화를 가져온다는 논리로 단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단일민족의 의미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발굴 이후 북한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며 우리나라에서 첫 노예소유자 국가를 세운 건국시조이다. 단군릉이 발굴되고 단군의 유골년대 측정결과가 나옴으로 하여 신화적 인물로 전해져 내려오던 단군이 실제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단군이 실존인물로 확인되면서 단일민족의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한 셈이다. 단군성왕의 후손으로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슬기로운 단일 민족성원으로 단합과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이 먼나라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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