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산 조송광 선진

경산 조송광(慶山 曺頌廣, 1876∼1957)은 기독교 장로였다.
기독교 장로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보고 성자적 인품에 감화를 받아 법하에 입문, 제자가 되었다.

조송광(호적명 공진 工珍)은 정읍에서 태어나 18세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고,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은거하여 의술을 익혀 이름을 사방에 떨쳤다. 의생(醫生)으로서 호를 야신(也神)이라 한 것을 보면 얼마나 명의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27세부터 기독교를 신앙한바, 김제 원평에 '구봉교회'를 설립하고 43세에 장로가 됐다. 기미년 만세운동에도 참여하고,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키도 했다. 조선의 독립과 좋은 세상 오기를 염원하던 조송광은 이웃에 사는 송적벽(호적명 찬오)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난다.

전주 한벽루(寒碧樓)에서 원기9년(1924) 봄에 역사적인 만남을 가진다. 조송광과 박중빈은 서로 도덕 문답을 시작했다.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는 쪽이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2시간이 흐를 무렵 송광이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약속대로 대종사의 제자가 된 조송광은 불법연구회 정식 회원은 바로 될 수 없었다. 교회 장로의 책임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종종 변산과 익산으로 대종사를 만나러 내왕을 했다. 원기10년 3월 10일, 송광의 약방에 불이 났다. 약재와 물품, 서적이 전부 타 버리고 말았다. 화재 사건이 5월 4일 불법연구회에 정식으로 입회를 하는 기연이 됐다.

송광의 법명은 평소에 대종사의 법설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광대하옵니다. 선생님의 도덕이여"하고 칭송을 하였으므로 그에 연유한 이름이다. 〈대종경〉 전망품 14장의 내용은 유명하다. 대종사가 기독교 장로인 조송광과 나눈 대화의 내용이다. 대종사, 하나님을 칭송하는 조송광에게 하나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직접 뵈옵지는 못했다는 송광의 답변에 "그러면 아직 예수의 심통(心通)제자는 아니라" 며 공부를 잘해서 예수의 심통제자가 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제자가 된 송광에게 대종사는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다"고 말한다.

입교 후 조송광은 원평교당 창립에 앞장섰고, 원기13년(1928)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에서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어 교단 초창기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원기16년 3월, 총회에서 불법연구회 회장에 재선된 조송광은 그 해 8월에 대종사와 더불어 부산과 경주 등 경상도 일대를 순회한다. 부산에서 많은 인연들을 규합한 대종사는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을 돌아본 후 경북 월성군 현곡면 구미용담의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유적을 돌아본다.

경산 조송광 선진이 대종사와 석굴암 불상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공타원 조전권, 운타원 조만식, 은타원 조일관 등 딸 셋이 전무출신을 했다.

<원불교신문사 사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