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도 감사도 다 신앙 안에 갊아온 삶"

남고생은 방학이면 짐을 꾸려 전국 교당들을 찾아 떠났다. 50여 년전, 당시에는 교당이 지금처럼 많지 않은데다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원평이며 부안·남원·창원·함라교당 등 교무와 교도들은 서울서 내려온 고등학생을 반가이 맞아줬고, 일주일씩 지내게 해줬다. 남고생은 교당 일도 돕고 어린이법회도 봤으며, 더러는 일반법회에서 강연도 했다. 참으로 동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서울교당 법산 이법선(法山 李法善·68) 교도의 추억이다.

"한 교당에 찾아갔는데 여자 교무님이 방 한칸에 사시는 거예요. 수소문해서 다른 교도님 집에 지내고, 아침이면 교무님이 밥 한 그릇을 들고 교도들 집마다 반찬을 얻어 상을 차려주셨어요. 그렇게 간고했던 우리 교단의 역사가 있었지요."

서울토박이로 시골이라고는 가본 적 없던 남고생을 전국 교당들로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중학교 시절 친구 윤영식(고윤석 미주선학대학원 전 총장의 조카)을 따라 서울교당에 왔던 원기46년, 그는 원불교도, 일원상도, 송영봉·박혜순 교무도 단박에 좋아졌다. 당시 150원 하던 교전을 사기 위해 전차비 1원50전 대신 10km를 걸어다녔던 중학생,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교전 초판은 1962년 발행된 것으로, 지금은 보기 드문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어린 나이에도 극진했던 교단 사랑, 그는 서울교당 학생회 졸업생들의 모임 '금광회'를 만들어 월1회 〈금광통신〉을 발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원기53년 시작된 〈금광통신〉은 총부 및 전국 곳곳에 보내졌고, 99호까지 10년동안 이어졌다.

그의 삶은 신앙과 특별한 인연도 이어왔다. 원기54년 입사한 삼영건설 시절, 당시 교화부장이던 이은석 교무가 찾아와 이듬해 있을 원불교 55주년행사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당시 익산은 길이 삼양라면까지만 포장되어있었거든요. 전국에서 5만명이 모이는데 총부까지의 도로를 포장하자고, 신입사원이던 제게 말씀하시는 거였어요."

일단은 내려가 도청에 간 그는 내무국장의 "도로포장을 해주면 내년에 돈을 주겠다"는 말에 "자리가 바뀌면 어떡하냐"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10여 명에 달하는 회계담당자며 도로과장 등을 불러놓고 약속을 하는 것 아닌가.

"서울로 올라오니 그제야 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도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어요. 그래서인지 의외로 오케이가 됐고, 그 후 반년을 하루 걸러 익산을 오갔습니다. 결국 교도님들은 포장도로를 걸어 행사에 참석하셨죠." 이후로도 남은 업무로 꼬박 1년동안 확실하게 매듭지었던 그,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 후 아내(오타원 유정훈 교도)와 종로교당에서 결혼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신앙생활했죠. 그러던 원기85년 위기가 왔습니다."

교단에 큰 충격을 준 종로신용협동조합사건의 복판에 그가 있었다. 부실기업으로 국가 관리를 받게 되면서 감사이던 그의 모든 재산이 압류됐고, 그럼에도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원망심도 고통도 컸습니다. 고민하다 생각해낸 것이 바로 참회문이에요. 매일 아침 참회문을 썼습니다. 한 글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니 집중을 다했죠. 그렇게 마음이 점차 안정되고 힘을 얻었죠."

원기86년 2월1일 시작한 그의 참회문은 원기89년 5월4일로 총 1천장에 이른다. 1천일동안 매일 참회문을 쓰는 동안 그는 두 번의 재판 끝에 벌금을 부과 당하고 마무리됐다. 이후로도 하이원빌리지 등 교단 중대사에 있어 그는 찬반을 떠나 늘 교단을 먼저 생각해왔다. "의견이 달라도 법회 출석은 해야한다"는 굳은 신념은 아내는 물론 어머니 고 조법인월 교도, 아들 규철·규열·규성에까지 영향을 줬다.

결혼 후 30여 년동안 매일 가족법회에 상시일기 기재, 더구나 결석한 기억이 없는 정도다 보니, '교당 가라'는 한마디 없이 단단한 일원가정이 된 것이다.

"큰 아들이 결혼해 일원가정을 이루면서 며느리(하법륜 교도)와 손녀들(정륜·유정)까지 일요일에 교당에서 만나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둘째와 셋째아들도 그래줬으면 싶어요."

매일 영주 300번에 일원상서원문 25독을 하고, 이를 세심히 기록한 적공의 흔적을 늘 차에 싣고 다니는 그. 반백년을 넘는 그의 신앙은 그를 진실한 비판자로 만들었다.

"서울교구 원덕회장을 맡으며 현안에 대한 관심과 의견이 커졌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만 넘어가는 것보다 적절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통해 긴 발전을 이룰 수 있지요. 비록 개인이 힘들고 안좋은 이야기를 듣더라도, 교단 역사에 있어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가 회장을 맡고 난 후 서울의 원로재가들의 지혜가 한데 모아지고 있다. 그와 서울원덕회가 최근 연마중인 화두는 바람직한 방향의 설교 모델을 개발하는 것. 감사는 물론 원망까지도 모두 신앙안에서 갊아온 그의 교단에 대한 애정과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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