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위한 '정당한 분노' 가능한가

모든 감정 잘 사용하는 법 알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인간관계 갈등으로 힘든 교무를 만났다. 크게 상처받은 모습이 마치 내 일 같았다. 며칠동안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마구 화가 났다. 올바르지 않은 현장의 일이고 과도한 권한 남용이었다. 더군다나 일반인들에게까지 원불교를 욕먹게 한다는 것이 교역자로서 부끄러웠다.

잘못된 일을 바르게 돌리고 싶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 사실이 맞는 것인지, 사실관계를 주변에 알아봤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화를 냈다. 상대방이 그렇게 못하게 막고 싶었다. 마치 열혈투사로 선봉에 선 느낌에서 묘하게 분노감이 활력이 되고 기운이 살아났다.

한편 '이래도 될까', '혹시 상대방이 알아서 직접 부딪치게 하면 되지 않을까.' 마음과 기운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이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울까?' 공동체를 살려내겠다는 '정당한 분노'인데, 왜 불편하지? 그 사람이 미웠다. 아! 그렇구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죄가 아닌,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었구나.

공동체를 위한 '정당한 분노'라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은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잘못했다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정말 내가 아는 것만이 사실일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그 사람도, 우리 공동체도 살리려면 '어찌 할꼬'로 마음이 간다. 상대방이 안타까웠다. 두 손을 합장하며 마음을 모은다. 법신불 사은님이시여! 그 사람이 '잘못된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집착에서 벗어나길!'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도 잘 되고 구성원들 모두도 행복한 길을 찾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다. 비로소 내 마음도 안정이 된다. 화난 마음도 참회가 된다.

미움을 내려놓으며, 일을 바루겠다는 마음이다. 이 일로 '정당한 분노'를 크게 경험한다. 무엇보다 먼저 내 안에 죄에 대한 분노와 판단, 평가가 보였다. 아!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구나. 그 느낌을 알겠다.

사람의 부정적인 미움, 분노와 긍정적인 감사, 용서, 행복이 사실 내 마음에서 비롯하는 하나의 에너지이다. 희노애락에 끌려서 자신과 남에게 해를 많이 보느냐, 희노애락을 노복같이 부려 써서 자신이나 남에게 이익을 많이 보느냐의 차이이다. 여기에서 각자의 마음을 잘 공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생긴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요훈품 35장에서 "이용하는 법을 알면 천하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고 했다. 모든 감정이 잘 사용하는 법을 알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지금은 내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정당한 분노'라는 감정을 친절한 호기심으로 잘 알아차리고, 경계를 따라 잘 사용하는 참다운 실력을 기를 때이다.

/과천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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