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7

▲ 김수인 원로교무
원기39년 6월 산서교당에서 박성석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경타원 김수인(璟陀圓 金修仁) 원로교무.

출가이전 고향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 고산마을에서 평온하게 자라왔다. 김달성 교무의 백모와 친어머니의 인연으로 원불교가 고향 마을에 들어왔다. 그리고 유장순 선진이 초대교무로 왔다. 훗날 박성석 선진도 부임했다.

두 교무의 치밀하고 정성스러운 인정교화는 가는 곳과 만나는 인연마다 감화를 받아 교화가 크게 활성화 됐다. 이 무렵 집안 두 형님이 가정방문을 왔다.

"원불교 본부에서 높은 어르신과 원광대 학생들이 동행해 법문과 노래를 가르친다고 하니 참석을 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집은 대대로 내려온 전통불교 집안이었다. 그래서 가을 추수를 하면 백미 몇 가마씩을 마을 암자로 보냈다.

고향을 방문한 어르신은 대산종사(법좌에 오르시기 이전)이었다. 어머니는 참석 못하지만 집에 있는 찬거리로 공양을 올리기로 하고 준비했다. 기정떡, 수정과, 김치, 생선, 고기 그리고 두고 잡수실 간식을 가족들 모르게 내가 심부름을 했다.

나는 공양을 올리고 인사를 했다. 이때 유장순 교무은 "저 아이를 출가시켜 산서교당 여자 전무출신 문열이를 만들고 싶은데 장수군 호랑이 조부님이 무서워 걱정이다"고 했다. 이 때 대산종사는 "유 교무 출가하고 비슷하겠구만" 라며, "아무리 엄중한 가문이라 하여도 본인 뜻이 확고하다면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원불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하여 부모를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부모와 가족 친지들의 축복으로 출가서원을 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불효인 줄 알면서도 '보람과 가치'를 알기에 가출을 하면서까지 출가를 했다. 그리고 어려운 경계가 올 때마다 '나는 석가세존의 유성 출가보다 더 어려운 출가이며 더 장한 출가'라는 자부심으로 이겨내기로 했다.

나는 금평교당 정윤재 교무의 인연으로 교당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복천 교무로부터 편지가 왔다.

'원광여고가 새로 설립되니, 입학수속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학교를 보내달라'는 간절한 내용으로 연락을 드리고, 총부로 와서 입학 수속을 했다.

나는 중학교 졸업반인 동생을 설득시켜 원광고등학교로 입학을 시키고, 동생 하숙비로 자취를 했다.
어느 날 정산종사께서 자취생들에게 미역과 멸치를 보내 줬다. 모두가 감격해 울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 소중해서 먹지 않고 바라만 보았던 기억도 난다.

나는 전무출신을 목표로 출가를 했고, 대학 과정을 밟았다. 그러므로 도량 상규는 교단의 법규요 출가자들의 기본자세로 생각했다.

당시 선(禪)에 대한 깊은 뜻도 모르면서 '좌선, 심고와 기도'는 수행자들의 일과이며 일상생활로 알아왔다. 그렇게 기쁨과 행복 속에 정진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본 박제현 선진은 크게 꾸중을 했다. "욕속심(慾速心)으로 부처를 이루려는 생각은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다. 항상 한가하고 여유로움으로 함이 없는 평떼기 공부를 하라"고 타일러 줬다.

자취를 하며 학교를 마치고 원기48년 모교 원광여자중고등학교 서무과 주사로 첫 부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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