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아이폰이라는 작은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던져준 시사점은 대단히 크다. 단순한 전화기능과 메시지 기능을 넘어 독서, 금융, 엔터테인먼트 등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범주들을 보란 듯이 묶어냈다. 사람들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창의적 아이디어'에 감동했고, 개발자인 스티븐 잡스가 우리 곁을 떠날 때에도 그의 공로와 열정을 기렸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창의성은 언제 어떤 원리로 일어날까? 독일의 심리학자 데익스터허이스(Dijksterhuis)는 '숲이나 공원을 산책할 때 사람들은 더 창의적이 된다'고 말한다. 산책을 하거나, 커피나 차를 마시며 쉬거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 아무 것도 들고 가지 말고 편하게 일을 보라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이완될 때 사람은 더 창의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인 게 '집중'이다. 집중한 상태에서 사람은 한 가지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몰두하느라 주변의 다른 단서(힌트)나 정보를 무시하기 쉬운데, 이를 '터널시각(tunnel vision)'이라 한다. 한 가지에 주의할 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것들을 억제한다. 일상에서 우리 생각의 초점은 할 일들, 걱정거리와 욕구 등에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창의적 상태'와는 멀어지게 된다.

또 하나 중요한 창의적 방법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통섭'이라는 책과 용어를 소개하면서 한때 '통섭에 의한 창의적 사고'가 널리 주목받기도 했다. 통섭(統攝)이란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어느 한 분야만을 고집하다 보면 학문 본연의 목적인 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식의 지식 안에 갇혀 편견에 빠진 단순한 지식 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봉사가 한쪽에서는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또 한쪽에서는 코끼리 코를 만지며 '이것이 바로 코끼리다!'하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쾨슬러(Koestler)는 그의 저작 〈The Act of Creation(1964)〉에서, 창의성을 '새로운 연결'을 찾거나 지각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즉 창의성이라는 것은 신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 인지의 어떤 특성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종합적 사고를 의미한다.

요즘 세상이나 교단이나 여러 가지 일들로 퍽 요란하다. 모두가 잘 해결해보자고 하는 생산적인 일일 게다. 여기에서 서로가 마음을 이완시키고, 내 입장 상대입장 널리 헤아려본다면 조금 더 '창의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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