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8

▲ 김수인 원로교무
원광여자중고등학교에 부임한 후 진타원 박제현 선진과 상산 박장식(원광남자 중·고교장)종사께 인사를 갔다. 상산종사는 '빙공영사 지공무사 선공후사'법문을 주면서 "어느 교화지가 되었든지 이 정신으로 표준을 잡고 교화를 하라"고 당부했다.

원광여고 설립 당시 교단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들어온 원여고 1회생 예비교무들은 학교설립 당시부터 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러므로 모교에 대한 애정도 그만큼 깊게 남아 있다. 우리 1회생들이 입학 당시에는 학교도 교실도 교사들도 갖춰져 있지 못했다. 지금 보육원 전신인 고아원 교실 한 칸을 빌려 예비교무 16명과 사회 학생들로 시작했다. 설립 초기에는 이곳저곳 이사도 많이 다녔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총부에서 총회가 열리면 헌타원 정성숙 초대교장은 눈물 섞인 음성으로 학교 보고를 했다. 혜타원 오희원 선진과 박제현 선진은 당시 교사로 근무하며, 방학이 되면 호소문을 준비하여 각 교당을 순방해 교사와 학생 모집에 정성을 다했다. 이렇듯 힘들었던 일들이 수없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학교가 이렇게 명문 여중·고로 성장하기까지는 초대 교장선생과 천산 이건춘 서무과장 그리고 지금까지 초지일관 학교를 지켜 온 교직원 모두가 교단 초창기 창립정신을 바탕하여 일심합력, 무아봉공 정신으로 땀 흘려 일궈온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크게 감탄하고 자랑스러움을 안고 나는 총부로 이동했다.

원기49년 중앙총부 재무부 주사로 부임하여 금강원에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 용타원 서대인 선진에게 인사를 갔다. 반갑게 맞아 주며 첫 말에 "학교 살림도 크고 힘들었지만 총부 살림이 더 크고 힘들 것이다. 총부는 하루에 한 때만 죽을 쑤면 쌀이 몇 되씩 저축이 된다"는 말로 절약정신을 심어 줬다. 나는 바로 식당으로 가서 쌀뒤주를 살펴봤다. 뒤주가 조그마한 방보다 컸다. 나는 체구가 작기 때문에 디딤돌을 몇 개 더 포개야쌀을 풀 수 있었다.

어느 날 쌀을 푸는데 뒤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실산 오해인 재무과장이 서 있었다. 과장은 "큰 소나무에 아주 작은 매미 한 마리가 붙어 있는 것 갔다"고 하며 "사도세자가 우리 뒤주에 들어갔으면 그리 쉽게 죽지 않았을 걸 뒤주가 너무 작았어" 하고 농담으로 지쳐 있는 식당 임원들의 피로를 풀어 주기도 했다.

당시 식당은 현재 원100성업회 사무실 자리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식당이 임시로 이사를 하게 됐다. 현재 재무부 사무실 자리다. 원기55주년에 치른 원불교 반백년 기념행사 준비로 구 건물을 철수하고, 기념관, 영모전 등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나는 서울교당 부교무로 이동했다.

선타원 유성일 교무를 모시고 약대교당 첫 출장법회를 시작했다. 경타원 이삼경 주무 댁에서 약대교당 첫 법회를 시작해 약대교당이 이뤄졌다. 부직자로 큰 책임감 없는 교화지였지만 20대 초반에 원광여·중고와 중앙총부 재무부, 서울교당 부교무로 스승들의 훈증 속에 초지일관 공명을 받들며 살았다.

대산종사는 종법사 위에 오를 때 육타원 종사 외 총부 어른들은 "수인이 너와 박덕준 교무가 범산 교무를 모시고 신도안에 가서 대산종사를 모셔 오너라"고 했다. 그 당시 대산종사가 내려준 법문이다. "수인 공전하여 만세 덕준 하리라." 이 법문을 지금까지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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