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풀어 보는 유물

▲ 명함(6 x 10cm, 1930~1940년대).
소태산 대종사가 사용했던 불법연구회 종법사의 직함이 적혀있는 명함으로, 전체의 내용이 모두 한문으로 표기가 되어 있으며, 세로쓰기 3줄로 적혀있다.

중앙의 상단에 종법사(宗法師)라 적혀있으며 그 하단에는 약간 큰 글씨로 대종사의 법명이 적혀있다. 법명의 좌측 하단에는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의 주소가 적혀있고, 오른쪽에는 중앙의 글씨와 가까이 불법연구회라 적혀있다.

전북이라는 행정구역이 누락되고 익산군부터 쓸 정도로 그 당시 행정구역 및 도시가 복잡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명함이 대중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회에 살던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도 "앞으로는 너희들끼리도 명함을 주고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며, 교단의 발전에 대한 전망과 함께 미래 사회를 예견하여 먼저 준비하고 실천하라고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바탕 속에 선진들도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되고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교역자가 되었기에 교단이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소태산 대종사는 원불교의 교조이며, 제1대 종법사는 정산종사로부터 계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듣곤 한다. 그럴 때면 소태산 대종사의 명함은 불법연구회 종법사로 표기가 되어 있는데 어찌 대종사가 1대 종법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곤 한다. 물론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는 마음과 그 위를 생각하여 공경하고 받드는 취지에서는 백번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제1대 종법사로서의 대종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현재 교단의 운영체제는 소태산 대종사 당대에 완비했던 행정체제를 모태로 하여 계승해 오고 있다. 교단의 지도자인 종법사, 행정을 대표하는 교정원장 이러한 직함들은 대종사 당대에 이루어진 행정체제로 지금까지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어느 종교도 교조 당대에 행정체제를 완비한 교단이 없으며, 교조의 직함에 대해 유물과 경전으로 고증까지 완벽하게 되어있는 유일무이한 교단의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는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항상 아쉽고 안타까운 점이 있다. 초기교단의 유물과 기록, 시행제도를 연구하면 미래사회를 선도할 혁신의 방향을 찾을 수 있고, 우리 교단의 잠재된 역량과 미래사회를 대비하고 지도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을 느낄 수 있지만, 오히려 사회를 따라가기에도 부족한 면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고, 박물관의 현실은 이러한 연구보다 선행되어지는 유물의 안전한 보관만으로도 벅찬 현실이다.

포화상태에 이른 수장고는 교단의 모든 것을 지키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모든 유물의 보존처리와 복제 작업을 해야 하고, 유사시를 대비한 복수의 수장고를 통한 유물의 분산 수용마저도 해결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연구기관을 운영하여 초기 교단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적용과 미래사회를 준비한다는 일은 지금 논자에게는 너무 요원하고 막연하게만 느껴진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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