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39

▲ 김수인 원로교무
원기50년 중앙교구 함라교당 2대 교무로 부임을 했다. 어느 지역이나 교화지는 비슷하겠지만 함라 지역은 많이 달랐다.
시골 농촌 조그마한 면 소재지에 만석을 가진 부자가 셋이 살았다. 만석군 한 집에 150여 명의 식솔들을 거느린 양반마을이었다.

종교도 백제무왕시대로부터 내려온 전통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등 각종각파의 종교가 있었다. 관공 기관은 면사무소와 지서(파출소), 우체국이 있으며 양반 마을 반촌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내려온 노소정이 있었다.

노소정은 고을 어르신들과 유지들 모임으로 그 지역에서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나면 상과 벌을 내리는 관공 기관보다 더 힘 있는 모임체였다.

이러한 고을에 고현종 교무님이 함라교당 초대교무로 근무했다. 당찬 교무님은 법당과 유지답 그리고 일반교도와 청소년 교도에 이르기까지 교도 사종의무 실천 공부를 철저하게 훈련시켜 많은 교도들이 자력이 서 있었다. 그리고 이임하시며 숙제도 주셨다.

"황등·함열·용안·강경·논산 지역에 교당을 세우지 못하고 떠나니 후임교무가 이루어 주라"는 것이었다. 조석심고에 빼지 말고 정성스럽게 다섯 지역을 넣어서 올리라고 하였다. 나는 정성을 다했다.
이렇듯 전·후임의 순수한 정성은 진리도 감응하여 다섯 지역에 모두 교당과 기관이 들어가 그 지역 주민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내가 부임 당시에는 만석군 할머니들이 모두 생존해 계셨다. 입교도 다 하여 교도 명부에 올라 있었다.

나는 양반 고을에 맞는 가정방문을 했다. 교도와 비교도를 가리지 않고 마을 어르신들과 노소정, 관공서를 시작으로 교도님 댁까지 인정교화와 법제 교화를 했다. 낮에는 가정방문, 밤에는 철자집, 명심보감 등 한문공부, 틈틈이 교전공부를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정순 주무(故 이회광 교무 모친)님이 함열 탁정영 회장님댁에서 교전을 보았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오 주무님과 둘이 1년 정도 출장법회를 다녔다. 교통이 불편하여 6킬로를 걸어 다녔다.

오 주무님의 발기로 함열교당이 시작되었다. 가면 주인은 없고 송아지 보다 더 큰 개만 나와 짖어댔다. 반년을 개와 법회를 본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교화에서 교당 주변뿐만 아니라 고을 오지까지 찾아가 힘들고 어려운 결손 가정을 살피고 도와주었다. 이러한 지역사회 활동들이 노소정과 관공서에서 모범 봉사상과 선도 선행상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함라교당에서는 이회광, 조학심 교무를 출가시킨 일이 큰 기쁨이기도 했다.
원기56년 동산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동산교당은 초대교무님이신 경타원 최수인화 선진의 특별한 인연으로 이루어진 교당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일화들이 담겨 있다. 학산 박석원, 백자인 내외의 힘으로 이룬 교당이다.

당시 동산교당에 부임한 교무님들은 식수가 맞지 않아 자주 이동을 했다. 나 역시 부임하여 몸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교당 건물도 오래되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막막했다.

어느 날 법당을 중심으로 대지 60여 평이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가 되었다는 통지가 날아왔다.
이 무렵 교당에서는 하숙생도 7명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육병우 3대 회장은 조용하게 일을 해결을 해 주셨다. 그리고 몸이 약한 나를 이동호 내과에서 치료를 받게 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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