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생가가 아니면서도 '이상의 집'이 되기까지는 숱한 사연이 있어 관광객들의 주목을 끈다.
3호선 경복궁역 2번출구로 나와 자하문로를 따라 가다보면, 우리은행 건물 옆으로 작은 골목길(자하문로 7길)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이 골목길에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서촌의 '시간의 단면'을 담고 있는 한옥이 하나 있다.

바로 '이상의 집'이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지난 80년의 시간을 머금은 한옥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마주 보는 벽에는 검은색 철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을 열면 컴컴한 공간에 계단하나가 빛을 향해 올라간다. 그 빛의 끝에는 또다른 서촌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이상의 집'은 이상(본명 김해경)이 살던 생가는 아니다. 시인 이상은 3살에서 23살까지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한옥은 이상이 집을 팔고 간 후인 1933년 집장수들이 필지를 5개로 분할해서 지은 도시형 한옥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사람들이 경성으로 몰리면서 주택난이 심각해지자, 당시 집장수들이 쇄락한 사대부의 큰 집을 매입해 집을 허물어 버리고, 필지를 작게 쪼개 서민을 위한 한옥을 대량 공급했다고 한다. 우리가 즐겨 찾는 북촌 가회동도 1930년대 판 재개발 주택단지다.

이상이 살지도 않은 집이 '이상의 집'으로 불리게 되기까지 참 사연이 많다. 오랫동안 '이상의 집'으로 불리던 이 집이 2003년에 매물로 나오자, 철거 될 것을 우려한 서촌 주민이자 건축가인 김원의 노력으로 김수근문화재단을 통해 매입하며 '이상 기념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다음 해인 2004년 9월에는 등록문화재로도 지정된다. 하지만 이후에 이 집이 이상의 생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실제 일제강점기 때 필지가 분할된 기록이 발견되면서 결국 2008년 6월에 등록문화재 등록도 취소된다.

그러다 2009년 7월에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다시 이집을 매입하면서, 지지부진하던 '이상 기념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아울러 재단법인 아름지기는 '이상 기념관' 건립과 더불어 문화 프로그램 부분을 담당한다. 특히 2011년 봄에는 '이상과의 대화(4월6일~5월31일)'라는 행사가 '이상의 집'에서 진행이 되었는데, 당시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리모델링된 공간이 참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리모델링된 '이상의 집'이 한시적이었다는 것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아름지기가 한옥의 훼손 상태도 심하고 이상의 생가가 아니니, 한옥을 허물고 현대적인 이상 기념관을 세우겠다고 하자, 주민들의 반발하기 시작했다. 비록 이상의 생가는 아니지만, 지난 80년 간 이곳에 쌓인 시간의 가치는 왜 보지 못하냐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특정한 가치관에 입각한 '원형'에 집착하고 있다면, 다른 쪽은 공간에 담겨진 삶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 가보니 시인 이상에 대한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아름지기가 '이상 기념관'을 신축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존 공간을 재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같았다. '이상의 집'을 한 바퀴 둘러보니, 서촌 주민과 예술인이 서로 소통하는 동네 사랑방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참 보기 좋았다. 시인 이상을 박제화하고 공간의 기억을 모두 소거한 '이상 기념관'보다는, 이런 공간이 진정 시인 이상이 꿈꾸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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