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0

▲ 김수인 원로교무
교도회장의 배려로 나는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이 무렵 전북교구 교도훈련과 교리시험이 처음 있을 때였다. 이때 동산교당 왕산 윤제덕 부회장이 최우수상을 받아 교당이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중앙총부에서는 전국학생 교리강연대회와 교리퀴즈대회, 연합회 회장 선출이 있었다. 동산교당에서 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학생연합회장을 배출해 연속 3대(하본연, 홍현기, 김병헌)를 이어갔다.

당시 교화부장이었던 좌산상사는 크게 칭찬을 해줬다. 나는 이때 용기를 얻어 동산중·고등학교 원우회 조직과 월2회 교양강좌를 했다. 이 활동들이 학생들의 입교로 이어져 청소년 교화에 활력소가 됐다. 학생들과 함께 40여 평의 묵은 땅을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면서 봉공정신을 심어줬다. 당시 시내버스정류장이 교당 앞에 있었다. 학생회는 버스정류장 청소와 동산동 오지에 있는 마을을 돌면서 구석구석 살폈다. 이런 활동으로 북전주경찰서와 동산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등에서 우리 학생회가 모범 청소년으로 선행상을 두 차례나 받았다.

동산교당에서 이뤄진 봉공회 활동, 어린이법회, 청년 원목회 등이 조직되어 교화에 큰 바람이 일어났다. 교도 입교수가 400여명이 되었고 최광선, 최항덕, 박도일이 소중한 인연이 되어 전무출신을 했다. 이 모두는 교도회장을 비롯 전 교도의 일심합력과 무아봉공으로 일궈낸 힘이라고 생각한다. 교당에 살면서 교화가 활성화되고 교도수가 늘어나 기뻤지만 무엇보다 학생회원들이 100여명이 넘게 활동하게 됨에 두 마음 없이 오롯하게 임했다.

원기66년 김제교당 4대 교무로 부임했다. 교도훈련이 잘되어 교화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다. 법당과 생활관이 오래되어 손볼 곳이 많았으며 연탄가스로 교당 식구들이 어려움을 겪어왔다. 당시 교도회장 내외(관산 이제심, 관타원 이성란)는 교당 주변에 있는 대지 160여평을 희사했다. 고선욱 주무 내외도 건축금 일부를 담당해 줬다. 교도 전체의 협력으로 큰 어려움 없이 이뤄져 지금의 생활관이 마련됐다.

당시에 새마을유아원이 전국적으로 부흥을 일으켰다. 대산종사가 원평교당에 정양할 때 "김제교당도 어린이집을 만들라"는 하명을 했다. 이 말씀을 받들고 여러모로 노력해 군에 행정과장과 복지계장을 찾아가 문의했다. 얼마 후에 교당과 가까운 남신새마을유아원을 수탁했다. 나는 초대원장으로 1년 안에 모범 유치원으로 선정받아 시와 군 면면촌촌에서 시찰을 다니곤 했다. 유아원 상담으로 원불교를 알리는 계기가 되어 큰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이때 자모교육과 어린이 교양강좌를 월2회 실시했다. 많은 상담으로 얼굴도 익히고 서로가 편안한 인정 교화가 이루어져 입교로 이어졌다. 이때 봉공회와 어린이법회가 결성되고 교화가 활기를 띠었다.

유아원을 위탁받는 데 도움을 준 재가 출가교도들에게 뒤늦은 감사를 전한다. 김제 후생병원장인 회장에게 '수달장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회장님은 좋은 의술을 가지고 있으니 전국 각지에 있는 교무들의 건강을 살펴주면 좋겠다"고 하니 내외가 쾌히 승낙했다. 이 무렵에 B형 간염이 전국에 확산되어 많은 환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당시 오희원 공익부장에게 바로 연락해 교무훈련 시 회장의 건강강의와 무료진료로 병을 조기에 발견하기도 했다. 당시 김제교당에서 정원구, 김혜인, 김덕인 세 사람이 전무출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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