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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인 원로교무 5 / 교화·교육·자선기관의 교역생활
김수인 원로교무 5 / 교화·교육·자선기관의 교역생활
  • 정리=이성심 기자
  • 승인 2015.11.13
  • 호수 17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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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대불공 41
▲ 김수인 원로교무
원기74년 경남교구 창녕교당 3대 교무로 부임했다. 교도는 많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교도 사종의무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교당 유지에도 많은 어려움은 없었으며 교도님들과 쉽게 적응이 됐다.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재미있게 교화를 시작했다. 법회출석도 조금씩 증가되었으며 입교도 40여명이 넘었다. 그로 인해 교당 비품도 많이 희사됐다. 대부분 법당과 생활관에 필요한 전기 제품 등이었다.

1년이라는 짧은 근무였지만 하성래 교무의 출가 등 정겹고 보람 있는 교화지였다.

원기75년 원광대학교부속 전주양·한방병원교당 초대교무로 부임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병원은 환자가 고객이다. 전주한방병원이 개원 당시에는 전국에 한방병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환자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당시 우리 병원 병실은 중환자실을 포함하여 350병상이 더 되었지만 전국에서 찾아온 환자들을 병실이 모자랐다. 복도에서라도 입원만 시켜달라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많았다.

나 역시 심고문과 기도문을 준비해서 병실을 방문해 기도 올리기에 시간이 모자랐다. 이 무렵 나는 되도록 입교를 많이 시켜 인근교당으로 인도했다. 그것이 지역 교화에 힘이 되도록 노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중앙총부 감찰원 감사가 있었다. 김대관 감찰원장이 직접 감사를 왔다. 감찰원장은 "우리 교단에 소속된 다섯 병원 중에서 교도들 입교가 제일 많이 되었고 서류도 잘 갖추었다"고 칭찬했다.

그때 입교는 5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산 정수광 사무국장이 소중한 인연이 되어 출가했다. 우리 병원이 이와 같이 성장하기까지는 의료원장을 비롯해 전 직원들이 초지일관 창립정신을 바탕으로 일심합력 일궈온 힘이라 믿는다.

원기81년 중앙교구 동이리교당 교무로 부임했다. 동이리교당은 일반교도와 청소년 교화에도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건물이 오래돼 손볼 곳이 많았다. 이 무렵 원광대학 양·한방병원에서 대각개교절 일환으로 어린이심장병돕기운동과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나는 대장촌 연원교당을 목적으로 전주한방병원을 찾아가 무료진료를 신청했다. 이언정 병원장님이 흔쾌히 승낙해, 나는 곳곳에 현수막을 걸고 홍보했다.

전주한방병원 무료진료는 하루에 3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찾아와 대성황을 이뤘지만 대장촌 교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교당 건축으로 들어갔다. 회장님과 전 교도님들이 여러 차례 논의한 결과 교당 건축을 하기로 결의했다.

건축은 덕양종합건설(대표 김우종·심민수 교도)에서 맡기기로 했다. 건축기금이 없어 회장(세산 이건영, 원타원 강영원)님 내외분이 집을 마을금고에 저당하고 기금일부를 마련, 나머지는 교도님들의 협력으로 부채 없이 이뤄져 봉불식을 했다. 새 법당에서 3대 회장 수산 조명량 대호법과 20여명이 넘는 법사 승급과 법호수여식을 가졌다.

당시 중앙총부에서는 전국적으로 입교운동을 크게 했다. 우리 교당에서 1년에 1천여 명을 입교시켜 총부에서 전국 1위 상패와 상장을 받았다. 소중한 인연 유종원 교무를 추천했다.

나의 일생은 교화·교육·자선기관을 두루 거치며 법을 받들고 살다 보니 교화하는 동안 큰 어려움은 없었다. 동이리교당을 마지막으로 일선 교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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