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하신 바 법은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니

저절로 되어지는 무위법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如來-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아 如來- 有所說法耶아.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법한 바가 있느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 또는 무상정편지(無上正偏知)라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여래가 얻었고 설법한 적이 있느냐를 물은 것이다.

須菩提 言하사대 如我解佛所說義컨댄 無有定法名阿多羅三三菩提며 亦無有定法如來可說이니,

수보리 말씀하되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아는 바와 같아서는 정한 법이 있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오며 또한 정한 법이 있지 아니함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시나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무유정법으로 이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이를 무상정편지라고도 한다. 이 뜻은 지금 금강경을 지면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금강경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고정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은 무유정법이라고 하였다. 〈대종경〉 인과품 18장에 공칠이를 비유하여 법문을 한 내용이 실려 있다. 대종사님께서 법을 설하시다가 눈앞에 공칠이가 보였기 때문이 공칠이를 인용하신 것이다.

〈대종경〉 부촉품 15장에 " 한 아이가 군호를 하매 일제히 일어서서 경례를 하는 것이 퍽 질서가 있어 보이더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대종사께서 대각전으로 가다가 눈앞에 아이들이 보이니까 아이들을 비유하여 법문을 설하신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그 때 그 상황 따라 법을 설하시는 것을 말한다.

야부선사(冶父禪師)도 이 대목에서 해석하기를 한적언한(寒的言寒)이요 열적언열(熱的言熱)이라 추우면 춥다고 말하고 더우면 덥다고 말하라고 했다.

何以故오 如來所說法은 皆不可取며 不可說이며 非法이며 非非法이니,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설하신 바 법은 다 가히 취할 수도 없으며 가히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니,

중생들이 문자에 언어에 집착할까 염려하여 '불가취 불가설'이라고 하였다. 무유정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고 상황 따라 법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정해진 법으로 단정 짓지 않도록 비법이라고 했으며, 법이 아닌 것이라는 것에 집착할까 염려하여 비비법이라고 했다.

所以者何오 一切賢聖이 皆以無爲法으로 而有差別이니이다.

어떤 까닭인가 하오면 일체 현성이 다 함이 없는 법으로 이뤄져 보통사람과는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무위법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 반대는 유위법(有爲法)이다.

유위법이란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기숙사에는 사규가 있듯이 사람이 만든 모든 법을 말한다.

무위법이란 진리가 나투는 법을 말한다. 천지가 춘하추동으로 변화하고 순환하는 것이며, 일원상의 진리를 요약하면 진리의 체인 불생불멸과 그 체(體)에 바탕하여 인과보응의 용(用)으로 나타나는 것을 무위법이라 한다.

우리는 보통 개령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과만을 생각하기 쉽다. 개령을 가지지 않는 무정물(無情物)의 존재들도 인과의 이치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무위법이라 한다.

이 법문에서도 성현과 범부 중생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무위법에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무위법으로 체를 삼고 범부들은 유위법에 바탕을 하기 때문이다.

원불교의 대표적인 공부가 유무념이다. 〈대종경〉 수행품 1장에 대종사는 "챙기고 또 챙겨서 필경은 챙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되어지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라"고 하였다.

'내가 챙겨야지'하는 것은 유위이고, 챙기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무위이다.

〈정전〉 수행편에 일기법이 있고 훈련법에 정기 훈련 11개 과목과 상시훈련법에 상시 응용 주의 사항 육조와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 육조가 있다. 전체를 축약하면 유무념이라 할 수 있다. 교전 전체를 마음공부라 하고 마음공부를 축약해서 유무념 공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유차별'이라 했는데 흔히 생각하는 차별심이나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위에 바탕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기 위해 차별이라고 했다.

무교위교(無敎爲敎)라 가르침 없이 가르치고 유교위교(有敎爲敎)라 가르침 있이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이렇게 지면에 〈금강경〉을 설명하는 것은 유교위교인 것이며 천지는 스스로 그러함을 나투는 것이 무교위교인데 모든 현성들도 마찬가지로 함이 없는 무위법에 바탕하여 나투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범부에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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