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진정한 평화, 상부상조 상생상화 할 때

▲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 광복 직후 한후이성 푸양에 주둔하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2구대 대원들이 광복의 소감과 환국 이후의 소망을 기록한 태극기다.
▲ 대산종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 한남동에서 만나 환담을 나눴다.
광복70주년을 맞아 평화를 노래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리마다 태극기가 일렁이고, 대형 건물 외벽의 태극기는 광복절을 앞두고 더욱 빛나고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는 겨레의 뿌리와 시련, 겨레의 함성 등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을 역사에 바탕해 전시하고 있다. '자주와 독립의 정신으로 지켜온 5천년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이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로 뼈아픈 고통을 당하면서도 나라를 되찾아 건국을 위한 순국선열의 독립운동은 5천 년 우리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광복 70주년과 원불교 100년을 통해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삶을 어떠했나.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을 보냈던 선열과 선진들. 독립기념관 관람 후 독립운동가의 불법연구회 방문에 대한 자료를 살펴봤다.

도산 안창호와 불법연구회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도산 안창호(이하 안 도산) 선생은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애국심을 전파했다.

대산종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출옥 후 이리에 오셨을 때, 대종사님을 친견했다. 그 후 광주에서 말씀하기를 '나는 민족 독립운동한다고 하여 사람에게 오히려 어려움을 많이 주고 있으나 불법연구회의 종사주께서는 조용히 참으로 큰일하고 있다'고 수행인과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안 도산의 불법연구회 총부 방문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안창호 선생은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본국으로 소환돼 약 3년간 대전 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5년 2월, 대전 감옥에서 가출옥, 전국을 순회했다.

안 도산이 이리역에 내린 것은 그해 여름. 안 도산은 동아일보 지국장 배헌(裵憲)의 안내로 불법연구회를 방문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손님을 맞이한 김형오 선진은 도산 일행을 신축한 대각전으로 안내했다. 이어 청하원으로 인도, 대종사와의 대면이 이뤄졌다.

대종사는 "찾아 주어서 고맙습니다. 말씀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많은 세월 풍찬 노숙과 3년간의 영어 생활에 건강을 크게 잃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물었다.

안 도산은 "상상보다 큰 규모의 시설에 놀랐습니다"고 말하고, 좌우 형사들을 가리키며 "보시는 바와 같이 나는 내 발이지만 어디를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내 입이지만 누구에게 내 맘대로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 뿐 만이 아니라 내 뜻을 따르는 동지들도 구속이 많습니다. 여기서도 박 선생(대종사)과 내가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박 선생도 나 때문에 불편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얼굴이나 정답게 보고 갑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도산은 "반항도 좋고 투쟁도 좋지만 참으로 민족의 대계(大計)는 박 선생 같은 정신운동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앞으로 민족의 정신, 실력 향상에 힘쓸까 합니다"고 뜻을 밝혔다.

이승만 박사의 총부 방문

대산종사의 회고에 바탕한 내용이다. 원기31년 6월5일에 이승만 박사(이하 이 박사)가 총부를 방문했다. 이 박사가 총부까지 방문을 하게 된 것은 대산종사가 서울에 주재할 때부터 왕래를 하며 친분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정산종법사께서 이 박사가 전국을 순회하는 것을 알고 총부로 초청했다. 당시 이리에서는 이 박사 환영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 박사가 이리에 도착하자 바로 환영식장으로 향했다. 종법사님과 나도 환영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환영식이 끝나고 문제가 생겼다. 환영위에서는 환영식이 끝나자마자 이 박사를 모시고 떠나버렸다. 이 박사 일행도 우리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정작 만나야 할 우리는 그 곳에 남아 있고 그들만 떠나버렸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 박사와의 면회를 요청했는데도 만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프란체스카 여사만 만나게 해 달라'고 하여 면회를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나(대산종사)를 보는 순간 반갑게 맞이하면서 "선생님이 오셨다" 하면서 우리를 이 박사에게 안내해서 이 박사를 만나 총부로 모시고 왔었다.

총부에 도착하여 정산종법사님과 만나셨다. 종법사께서 반갑게 맞으시며 "그동안 해외에서도 큰일을 하셨습니다. 어려운 방문을 하였는데 방문 기념으로 글을 하나 써 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이에 이 박사는 '성경신(誠敬信)'을 그 자리에서 써 주었다. 총부를 다녀간 뒤로도 이 박사는 내가 한남동에 있을 때 3~4번 찾아왔었다.

대산종사, 백범 선생과 만남

대산종사는 서울 한남동 정각사에서 서울출장소장으로 근무 당시 백범 김구와의 만남에 대해 여러 번 회고했다.
대산종사는 "이 박사가 나를 백범 김구(이하 백범) 선생에게도 소개해 주셨다"며 "이 두 분은 그때까지만 해도 퍽 가깝게 왕래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대산종사가 백범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은 이 박사의 소개도 있었지만,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의 역할도 있었다. 대산종사가 상산박장식 종사와 함께 서울 이화장(梨花莊)에서 백범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이 박사는 우리를 불교혁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우리 교단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백범 선생은 한동안 이 박사의 말씀을 들은 후 "내가 중국에 있을 때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핵심 된 불교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불법연구회가 바로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종교인 것 같습니다"는 것이다.

대산종사는 서울에 있는 동안 국내 정치인들과의 교류가 잦았었다. 훗날 대산종사는 "정교동심(政敎同心)의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그들을 대했기 때문에 그들도 부담 없이 나를 만나주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이화장에서 처음 만난 백범 선생은 그 후 자주 한남동에 발걸음을 했다. 처음 백범 선생이 방문했을 때 일인들이 쓰다 남은 의자가 하나 있어 그 자리에 모시려고 했다. 백범 선생은 극구 사양하면서 "오늘 청법자(聽法者)다"고 했다. 그리고는 꼭 존대를 했다. 대산종사는 민망해서 "아버지 같으시니 말씀을 낮추십시오"라고 했다. 백범 선생은 "아니다. 종교인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지도자인데 그렇게 세속인들처럼 함부로 말을 낮출 수는 없다"고 했다. 때때로 머리 아픈 일이 생기거나 틈이 나면 한남동에 오셔서 쉬고 가셨던 백범 선생. 대산종사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이야기를 밤늦도록 들려 줬다. 서문성 교무가 엮은 〈원불교 예화집〉에서는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독립기념관 전시회 마지막 주제는 한일 어린이들의 그림편지 교류였다. 5년 동안 주고받은 그림편지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친교의 마음이 표현돼 있었다.

또 광복의 숲에서는 '평화, 통일, 나라사랑'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평화의 소중함을 알았다. 지금 또 다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반듯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것이다." 아픔은 치유의 과정을 통해 회복이 된다. 광복70주년, '조국의 진정한 평화는 상부상조, 상생상화를 통해 온다'는 대종사의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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