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2

▲ 김정근 원로교무
동산선원, 간사생활 시작
가는 곳마다 혈성으로 임해


수타원 김정근(秀陀圓 金正根) 원로교무는 원기38년 9월 도양교당에서 김인철 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했다. 일찍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교당을 다녔기에 어린시절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백수 길용리에 가면 여자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산다"는 것이다.

영산에 가서 그렇게 공부하고 싶었던 김 원로교무. 당시에는 차가 없어 30리 되는 길을 걸어서 가야 했다. 그래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모였던 온타원 이성로 교무는 일찍부터 도양교당에서 출가해 익산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소식이 뜸했다.

22세 때 한국전쟁을 만났지만 어려움을 무사히 넘기게 됐다. 마음속으로는 '나도 언젠가는 원불교로 갈 것이다'고 다지곤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편지가 이모에게서 왔다. "너는 꼭 원불교로 와야 한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라." 그리고 원기38년 9월 익산으로 갔다.

동산선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나의 간사 시절도 시작됐다. 당시 나는 25세였다. 선원생은 40명, 교사는 5명, 원장은 고산 이운권 종사였다. 그때는 먹을 것도 없고 정말로 가난했다.

만 6년 넘게 근무하고 7년째가 되자 중앙선원으로 공부하러 갔다. 공비생으로 2년 공부하고 나는 쉬게 됐다. 동산선원에서 법문을 많이 듣고 희열에 넘치는 생활을 해서인지 교리공부도 이해를 쉽게 하고 빠르게 깨달았다. 좀 쉬고 있으니 몸도 좋아져 도양교당으로 갔다.

나는 순교로 1년을 근무하고 인사교체기가 되어 교무들이 바뀌었다. 그리고 교당과 도양고등공민학교가 분리됐다.

나는 학교 살림을 맡아 하라고 발령을 내주었다. 새 교장으로 권재홍 교장이 부임했다. 처음 학교 교사들의 기숙사가 생기고 점심 밥을 해줘야 했다. 아무것도 없어 나는 도양교당 김덕진 교무와 상의했다. 살림살이를 조금씩 가져가기로 했다. 이불이며 그릇들 중에서 좋은 것들은 교당에 놓고 나머지를 학교로 가져왔다.

우리는 밭에다 고추농사, 깨 농사를 지었다. 학교에서는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키웠다. 학생들이 뽕을 따다 주고 내가 주로 밥을 주고 키웠다. 누에에게 밤에 자다가 밥을 주어야 했다. 그 방에서 자면서 누에 밥 주는 일을 했는데 어지럽고 몸이 이상해졌다. 누에를 열심히 키워 등급을 잘 받아 돈을 잘 받았다고 했다. 내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나중 말을 들으니 누에 방에서 자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에가 사람 기운을 뺏어간다는 말이 있었다. 나는 그때 어지럽고 온 몸에 가려운 증세가 생겼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아 이동을 하려고 했다.

강묘진 교무님이 대구 서성로교당으로 가면서 같이 가자고 해서 1년을 같이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교도들 몇 분과 좌선, 염불을 주관하면서 기쁘게 살았다.

전주양로원에 근무할 때 위산 권성철 원장은 너무나도 고생하고 일도 많이 하면서 지냈다. 나는 그곳에서 할머니들을 보살피면서 마음공부도 함께하고 힘든 나날을 보냈다. 밥은 알람미 쌀로 하니까 정말 먹기 힘들었다. 그러나 원로들도 다 드시고 사니 나라고 별수 없어 먹어야 했는데 얼굴에 버짐이 피고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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