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진 교도
23살 때까지 기독교를 신앙해온 나는 10살 연상의 남편을 중매로 만났다. 남편은 당시 원불교에 온통 빠져 있었다. 신혼 초 시댁과의 종교 갈등으로 무척 힘들어하는 나에게 남편은 서로의 종교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하고 어느 쪽이든 좋은 곳을 하나 선택하기로 했다. 남편이 전해준 원불교 이야기를 듣고 나는 더 이상 내 종교만이 옳다고 고집할 수 없었다.

남편은 〈원불교교전〉에 나와 있는 예전을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 다 제시돼 있었고 남편은 그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결혼 3개월 만에 나는 원불교에 입교하게 됐다. 그 후로 교당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때론 교무 보좌불로, 때론 교구 교화발전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아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니 걱정이 앞섰다. 신혼 초 신앙이 다른 시댁과의 마찰을 직접 겪어봤기에 혹여 아들과 며느리도 같은 상황에 부딪힐 까 하는 염려였다.

아들은 다행히 자신보다 2살 어린 32살의 불교집안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기로 했다. 전통혼례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나는 함 안에 보석과 함께 교전을 포장하여 넣었다. 원불교 의식을 조금이라는 더 전하고 싶은 마음에 양가집이 의논하여 결혼식 주례도 교구장에게 부탁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신혼여행 가방에 간단한 편지를 넣었다. '한 집안에 종교는 하나여야 한다. 우리 함께 같은 신앙생활하며 구씨 집안을 이끌어가지 않겠니?'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며느리에게 조심스레 교당에 가보자고 권했다. 며느리의 첫마디가 "네 어머니 교당에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신혼 초, 시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원불교에 다녔는데 며느리는 부부 금슬도 좋고 성격도 좋았다.

나는 경기도 일산에 신혼살림을 차린 아들내외를 위해 주위의 교당을 물색해 보았다. 신입교도에게는 뭐니 뭐니 해도 인정교화와 교당 분위기라 생각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니 화정교당을 소개해 줬다. 내가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 하니 화정교당 교무님은 다과를 차려 놓고 반갑게 맞아줬다. 그 후로 아들 내외는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당에 나갔다. 가정에 일원상 봉안식도 했다. 봉안식을 하고 나서는 며느리가 가위눌림이 없어졌다며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난 후에 나는 조심스레 입교를 권했다. "너희 남편은 대산종사가 법명을 지어줬으니, 너는 경산종법사에게 법명을 부탁하면 어떨까?"고 물었더니 며느리는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박선제'라는 법명을 받았다. 며느리는 입교식 내내 눈물이 나와 참느라 혼이 났다고 한다. 며느리는 내가 교당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교당에 다녀오면 꼭 전화해 알리고, 선물할 물건이 생기면 교당에 갖다 드렸다고 자랑한다.

한번은 며느리가 내가 사경하는 모습을 몇 번 보더니 남편 기다리는 동안 자신도 사경을 하겠다고 하고 아들에게도 권유해 나란히 사경을 1번씩 마칠 정도로 기특한 행동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2년여를 열심히 교당을 다니던 아들이 인도네시아의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며느리는 제일 먼저 인터넷을 통해 그곳에도 교당 있는지 알아봤다고 한다. 하지만 교당은 없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그곳에서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에게 기도를 부탁해온다. 복 짓기를 좋아하는 아들내외라 나는 보은미 유지비를 자동이체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둘은 두 말 없이 승낙했다. 그러던 중 딸아이 둘을 얻게 되었고, 교당은 비록 다니지 못하지만 사경과 기도로 변함없는 공부인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며느리를 통해 나는 입교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어렵다 생각하고 못한다고 생각했던 입교권장이 다른 게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지극한 불공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화는 불공이란 말을 실감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불공하여 입교시키면 가족의 화목은 자연 따라온다. 우리가 지금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입교운동을 펼치면 교화대불공의 불씨가 다시 지펴질 것으로 본다.

신마산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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