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3
양로원 어르신, 부모님처럼
변산, 동네 집집마다 순교

▲ 김정근 원로교무
양로원에는 까다로운 할머니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 부모님이다' 생각하고 뜻을 다 받아 주고 3년 동안 잘 근무했다.

양로원에 살면서 덕진교당을 내려고 우리 법당에서 교도님 몇 분과 양로원 어르신 30여 명을 모시고 법회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고창으로 이동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실력도 없어 혼자 가서 못산다"고 하니까 고산종사께서"오래 살지 말고 조금만 지내라. 그리고 정성껏 살면 된다"고 하셔서 고창교당으로 가게 됐다.

당시 최육원 교무님이 불치병에 걸려 갑자기 인사가 된 것이다. 고창교당에서 근무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값지게 보냈다.

원기55년에 부안 변산 마포 개척지로 발령이 났다. 7월에 처음으로 부안교당에 들렀다. 부안 교무님은 변산 마포에 연원교당을 내려고 출장법회를 몇 번 다녔다. 그 때는 비포장 길에 버스가 하루에 몇 번 정도 있어 오가는데 네 시간 정도 걸렸다. 부안 교무님이 출장 법회를 세 번쯤 보다가 인사요청을 해서 내가 가게 됐다.

부안교당에 들리니 쌀 세되, 간장 한 병, 돈 1만원을 주어서 가지고 교무님과 같이 가게 되었다. 도착해 보니 집은 초가지붕에 풀이 나있고 마당에는 내 키 정도로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문창살은 모두 빠져 있는 내 생애 처음으로 그런 집을 보았다. 나는 마당 잡초를 다 뽑은 후 동네 집집마다 순교를 했다.

기독교, 천주교는 오래되어 많이들 다녔다. 무종교인들을 열심히 순교하고 초등학교에 가서 교사들과 교장선생님을 방문했다. 교장선생님이 익산분이시고 북일초등학교에서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장로님이시다. 그리고 부부교사가 있는데 신혼 때 바로 마포로 와서 자녀도 낳고 시어머니가 계시는데 불교신자였다. 할머니는 원불교가 와서 좋다고 하셨다. 그러다 부부가 입교하고 일원가족이 됐다.

나는 본격적으로 열심히 마을을 순교했다. 남자들은 노름하는 사람이 많았다. 교당 나오는 분들도 겨울만 돌아오면 노름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계문을 가르치고 외우게 하고 교회, 천주교 다니는 집 빼고는 입교를 시키고 동네 유지들은 원불교를 다녔다. 학교 선생님인 교감선생님 주임교사도 우리 교도가 됐다.

나는 화분을 잘 길러서 겨울에 꽃이 피게 해 학교 졸업식 때는 빌려가도록 했다. 봄에는 꽃씨를 학교에 보내주고, 우리 교당에는 꽃을 많이 심어서 꽃모종을 나눠 주어서 집집마다 마당에 꽃밭을 만들게 됐다. 여름에는 방학 때 교학과 학생들을 오라고 해서 학교 교실을 빌려 어린이들 훈련을 해마다 났다.

초가집에 기와를 올려 집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3년을 살면서 내가 먹고 남은 쌀을 여름에 어려운 교도들에게 나눠 줬더니, 농사지으면 새 쌀로 더 보태서 받게 되었다. 정월에는 교리 강습을 꼭 났다. 좁은 마루방까지 앉으면 50여 명씩 앉아서 교리 강습을 나고 학교 선생님들도 방학하고 열심히 났다. 제일 처음에 화산 김일현 선생님 모시고 3박4일을 났는데 대성황이었다. 그 다음에 한정석 교무님, 또 그 다음에 김의선 선생님, 그 다음에 박제윤 선생님, 그리고 여름에는 의료봉사로 원광대학에서 치과의료봉사를 와서 400명이 와서 치료를 받았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