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풀어 보는 유물

▲ 성계명시독(20.7 x 27.3cm, 1970년대)
성계명시독은 소태산 대종사 당시에 실행하여 만든 자료이나 현재는 그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성계명시독은 교단 최초의 복원유물로서 형타원 오종태 선진이 원청 20주년 행사 당시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형타원 오종태 선진의 유품 속에서 발견되었고, 둘째로 한솔종이박물관에 의뢰하였을 때 1970년경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 당시에 형타원 오종태 선진은 영산선원장이었기에 지도할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유물의 내용은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 직후 제자들에게 10일 동안 지낸 내역을 청·홍·흑점으로 기재하게 했고, 이를 통해 신성의 진퇴와 실행여부를 대조하도록 하였던 공부법이다.

유물의 외형은 좌에서 우로 넘기는 책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표지의 좌측 상단에서 세로쓰기로 성계명시독이라 적혀있다. 책을 펼쳤을 때, 좌측면에 기재하도록 되어 있고, 세로쓰기로 10일간의 내역을 기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기재하는 면의 우측 상단에는 공부인의 이름을 적도록 했고, 이름 아래는 세로쓰기로 해당 월을 기재하며, 그 좌측으로 날짜를 쓰도록 되어 있다. 글씨의 필체는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글자의 크기 등이 일부 고르지 못한 것으로 볼 때 책을 만들 때 인쇄를 한 것이 아닌 붓으로 전체의 틀을 그려서 기재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유물에는 '송도군'이라고 정산종사의 호적명이 기록되어 있다. 교단의 모든 공식기록물이 법명으로 기재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유물은 법인기도를 통한 법명을 받기 이전인 원기4년 전에 기록이 된 유물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유물의 복원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의 첫 지도법이었던 성계명시독은 정산종사가 직접 저술하여 소태산 대종사 재세 시에 발표되었던 창건사를 통해 문헌으로 증명되었고, 다행스럽게 복원이 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고 다행스럽다.

또한 이 유물의 복원시점은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였던 선진들이 생존해있는 시점에서 복원된 유물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유물복원 작업은 지금 같은 명분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대종사의 가르침을 직접 수행하는 작업에서 자연스레 복원품이 남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대종사의 중요한 자료가 어떻게 생겨져 있는가 만이라도 확인해 볼 수 있는 큰 결과가 있게 된 것이다.

형타원 오종태 선진은 전에도 밝힌 바와 같이 교단의 유물과 기록에 관련해 특별한 선진이다. 논자가 유물을 정리할 때 소태산 대종사를 알아가는 기쁨으로 일에 매진할 수가 있었는데, 형타원 오종태 선진의 유품 속에서 성계명시독을 비롯해 소태산 대종사와 선진들의 삶과 가르침을 대표할 수 있는 많은 유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와 대종사로부터 직접 훈증을 받고 살아온 선진들의 삶을 유물로 느끼고 알아갈수록 내가 교도라는 점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요즘에서 논자를 통해 계속 주장되고 있는 유물의 복원을 교단의 선진들이 일부 해 놓은 것을 볼 때, 놀람과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때로는 마음이 가라앉을 때 다시금 나를 챙기는 원동력이 되어주곤 했다.

교단의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사회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우리 교단의 모습을 갖추는 것과 함께 대종사와 선진들의 뜻과 경륜이 오히려 침체되고 단절되지는 않았는지, 초기교단의 사회를 선도하던 역량과 저력을 어떻게 하면 되살릴 수 있을지 교단적으로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 논자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만 해도 대종사를 친견한 원로들이 많이 있었으나 몇 년 사이 많은 원로들이 열반에 들면서 대종사를 친견한 원로들이 몇 분 남지 않았다. 하루라도 속히 초기교단을 연구하고, 고증하는 작업을 추진해야 할 텐데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아쉽고 야속하기만 하다.

원불교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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