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4
교화 위해 교당불사 각오
새우젓·김 장사부터 시작

나는 시골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큰 부담없이 교화를 하고 될 수 있으면 말을 조심히 하면서 살도록 가르쳤다. 왜냐하면 동네가 교회와 성당이 있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모이면 말이 많아졌다.

작은 동네라 금방 말이 퍼진다. 노인 할머니 집사가 있는데 그 분은 신앙심이 깊고 정말로 타의 모범이었다. 나는 그 분하고 많이 통했다. 그리고 당신 생일 때는 꼭 나를 초대했다. 난 소화제를 가끔씩 드렸다. 한 번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장로님이 원불교 선생님이 주는 물건이라면 교회로 훔쳐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찡했다. 정말로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나고 오래 살수록 조심하고 대종사, 정산종사께 간절히 기도했다. 대산종사께서는 이 세상을 살얼음 밟듯이 살라고 했다.

나는 9년 살고 교당을 지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곳은 교도는 가난해서 불사를 많이 못할 것 같고 또 좀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난다. 그리고 청년들도 다 떠나고 우리 부회장인 학교 교사부부도 전주로 전근을 간다고 그 학교에서 20년 만에 떠나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주인이 떠나니 내 마음이 허전하고 무엇을 도적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방학 때 모두 좋아하는데 오래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만 오라고 하고 숙제도 내주고 예절도 가르쳤다. 아이들이 달라지고 교사들도 우리 말은 안 듣는데 원불교 선생님 말은 잘 듣는다고 모두 좋아했다.

나는 아이들을 총부에 한 번 순례시켰으면 했으나 엄두가 안 났다. 생각한 끝에 우리 교도들과 상의를 했다. 요인 회의를 하기를 바다에 가서 바지락 한 번 캐다가 젓갈을 담아 팔자고 나는 말을 했다. 그래서 하섬 앞에 가서 제일 물때 긴 날을 잡아서 갔다가 밤에 또 모두 와서 바지락을 까서 젓을 담았다. 한두 동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팔아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하니 순창교당이 생각이 나서 교무님에게 전화했더니 오라고 했다. 그때 김대심 교무님이 있었다. 그래서 용달차를 불러서 생전 처음 순창 쌍치재를 넘어서 정말로 첩첩산중이다.

한 2주 걸쳐서 전부 팔아서 돈을 보내줬다. 너무 고마웠다. 우리 교도들도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궁금하겠다 싶어 또 회의를 했다. 우리 마포 동네 아이들을 대리고 총부와 원대 구경을 시킨다고 했더니 모두 좋다고 했다. 그래서 날짜를 잡아서 종교를 떠나 온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차량 35인승 2대를 불러서 가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80명이 된다고 이장님이 통보해서 한 차는 큰 차를 불렀다. 총부와 원대를 다 보고 저녁은 태백 칼국수에서 공양해 주어서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교당에 오고 싶지만 법당도 없고 집은 작아서 아이들이 교회로 많이 가곤 했다. 나는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7년 넣은 쌀계를 마치고 불사를 하려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을 할까 연구를 하다 '아 대종사께서도 숯장사, 엿장사'를 하셨는데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교당 문을 닫을 수는 없고 교도들은 가난해서 도움이 안 된다. 이제 나도 용기를 내자 했다. 새우젓 장사와 김 장사를 하며 기금을 모았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