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태원 교도
정치적 신념이나 사상 그리고 종교는 인간을 인간답게 이끌어줄 것 같지만 믿음이 과해지면 오히려 견디기 버거운 숙제가 된다. 디지털 혁명 속에서 전 세계가 하나가 된 지금,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시대는 지났다. 하지만 종교 간의 충돌을 보노라면 여전히 총탄이 오가는 살벌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지난 11월13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프랑스 파리 테러의 이면에도 종교의 맹목성이 숨겨져 있다. 물론 신을 믿고 의지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길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욕망일지 모른다. 다만 그 믿음 안에 자기정화와 성찰의 힘이 없다면 종교는 부지불식간에 광기에 빠지고 만다. 종교가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심장부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원다르마센터를 포함해 세계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소통과 화합을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어야할 책임이 있다. 종교인들에게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다. 종교 지도자들이 조직을 바르게 경영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상상력과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생산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는 칭기즈칸의 리더십이 해답이라 생각한다. 이는 결코 그가 불우한 환경을 극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왕이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줬다는 뜻이다. 칭기즈칸처럼 다름을 배척하지 않고 수용해줬다면 전 세계를 위협하는 폭탄테러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뿐만 아니라 칭기즈칸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기보다는 진심으로 아랫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지만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사신을 보내 협력관계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보다는 평화가 모두에게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전쟁을 해도 적국의 장수를 숙청하기보다는 포용했다. 그로 인해 각국의 유능한 장수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은 공정하게 배분했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동기부여가 어디 있겠는가.

군인들은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즐겁게 싸울 수 있었다. 전투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지휘관으로 발탁했으니 열과 성을 다해 전쟁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진심으로 사람을 대해 동기를 부여하고 나아가 감동시키는 것이야말로 21세기가 원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이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2002년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나로 만들어주었던 히딩크의 리더십도 주목해봐야 한다. 그때처럼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같은 소리를 냈던 적이 있었을까. 당시 우리가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오래된 병폐를 뿌리 뽑으며 평등한 기회를 준 덕분에 축구 신예였던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를 누비며 대한민국의 축구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만일 리더십 부재로 태극전사들의 팀플레이가 제각각이었다면 결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동안 대한민국 전역을 뜨겁게 달군 마이클 샐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온정에 치우치면 자칫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종교라는 미명 아래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아량이 없어지는 경우를 가끔 본다. 종교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의 생각을 무조건 배타하는 것이다. 이는 모순 중에 모순이다. 나날이 달라지는 주변 환경과 제도가 성직자의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화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과 같은 초연결 시대에는 소유가 연결이 아닌 통제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실체는 연결이고 실력은 매개이며 실권은 통제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구름, 즉 클라우드나인(Cioud 9)은 연결을 통해 매개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이를 종교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비유하자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각각의 종교를 연결하고 매개가 되어야 한다.

새로 선임된 교정원장과 감찰원장 등 새 간부들은 교단 총화를 이루는 통 큰 리더십을 발휘해 원기 2세기를 세계 종교 원불교로 지향하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 주시길 기대한다.

잠실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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