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공현장 누비는 살림꾼과 해결사
교무 중매 인연으로 오롯한 일원가정
서울역 노숙인 저녁공양 설거지 5년

수요일 저녁 7시, 모두가 퇴근한 서울회관이 다시 소란해진다. 원봉공회 빨간밥차가 서울역 노숙인 저녁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면, 배식을 마친 봉사자들의 봉공 2라운드가 시작되는 것이다. 조리, 배식, 뒷정리 중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400인분의 설거지를 위해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챙겨드는 여의도교당 홍타원 이태언(弘陀圓 李太彦)·관산 박인관(寬山 朴認寬)부부, 노숙인 공양 5년 동안 늘 뒷정리를 맡아온 그들이다.

"처음에는 교당에서 순번 돌아오면 했는데, 배식까지는 봉사자들이 있어도 설거지는 늘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냥 두고 못 가겠어서 '여보, 우리 설거지 하고 가자'고 했죠."

봉공현장이든 교당이든 살림꾼으로 역할하는 이태언 교도의 말에 남편 박인관 교도는 흔쾌히 팔을 걷어부쳤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지만, 원불교 일이라면 늘 아내를 더 돕지 못해 안달인 그라서 당연했다. 차마 그냥 가지 못해 시작했던 일이 어느덧 5년, 이제는 찰떡궁합에 호흡척척으로 산처럼 쌓인 설거지도 뚝딱이다.

"3년 전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부터 골반까지 골절됐었어요. 세달 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마침 제가 퇴직한 해라 늘 병상을 지켰죠. 수요일 오후부터 저녁까지만 아들더러 와있으라고 하고 혼자 배식과 설거지를 했습니다."

결국 이태언 교도마저 몇 달만에 현장으로 복귀, 배식과 설거지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힘들 것도 따로 마음 낼 것도 없다"고 입모아 말하는 공심과 정성에, 올해도 작년에 이어 서울봉공회 자원봉사자축제에서 부부봉공인상을 수상했다.

"아내는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봉공이나 교당 일에는 빠지지 않는 사람이죠. 예전에는 교당들이 목욕, 복지관, 김장 등 봉사활동을 많이 했는데 아이들 업고 메고도 가고, 좀 크면 두고도 갔어요."

어떤 교무라도 탐내고 어떤 교도라도 의지하고 따르고 싶은 이 일원가족은 시작부터도 그랬다. 원기74년 대마교당 출신의 이 교도와 형 박인호 교도(서울교당)를 따라 나오기 시작한 박 교도를 맺어준 건 당시 여의도교당 이효원 교무로, 만난 지 반년도 안 되어 서울회관 한강예식장에서 결혼했다.

"알고 보니 제가 자주 갔던 거래처 건물에 남편 회사가 있었더라고요. 아마 몇 번은 옷깃이 스쳤겠다 싶었죠. 게다가 신혼살림을 했던 집이 영광빌라, 그 집을 구한 부동산도 영광부동산인 거죠." 별 것 아닌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신기하고 기쁜 인연이었다. 매사가 감사거리였던 신혼 초, 안양에서 교당까지 오가는 동안 아들 성관·대종도 세상에 나왔다.

"둘째 100일 딱 지나고 아내가 교당에 가는데, 당시 저는 회사 일로 일요일에도 종종 근무했거든요. 그럴 때도 씩씩하게 작은애 업고, 잘 걷지도 못하는 첫째 손잡고 버스 두 번 갈아타며 교당에 가는 거예요."

교당에서 방석 두 장을 앞과 옆에 깔아 형제를 눕히면, 대견하게도 울거나 보채지 않고 법회를 같이 봤다. 이듬해에는 승용차를 샀는데, 어찌나 교당을 많이 오갔는지, 조수석에 앉혔던 작은 아이 얼굴이 늘 시골아이 마냥 까맸단다.

무아봉공도 부창부수, 아내가 살림꾼이었다면 남편 박 교도는 해결사다. 시스템관리 및 설비 분야의 특성을 살려, 교당에서 뭐가 고장나기만 하면 박 교도가 나타나 말끔하게 손보곤 했다. 퇴직 후 형과 회사 디씨텍을 창업한 뒤에도 해결사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식당이 따로 없는 여의도교당은 법당에서 접시로 점심공양을 하는데, 의자에 붙은 난간이 좁아 늘 불편함을 겪었더랬다. 그걸 보고 그 많은 난간들에 일일이 나무판을 붙여 모두가 편해진 것도 박 교도의 작품이다.

"수요일엔 밥차 봉사, 금요일엔 너섬합창단 공양준비, 일요일엔 법회, 그리고 그 외에도 하루는 교당이나 서울회관에 나오게 되더라고요. 일주일이면 나흘 정도는 오후부터 저녁까지 함께 하죠."

결혼 27년째인데도 늘 붙어다녀 더 좋다는 이 부부. 일요일 오후 결석 교도들에게 예회보 보내는 일도 15년 넘게 해왔다. 그러다보니 늦게까지 남아있기 일쑤, 아예 김덕수 교무가 저녁을 사주는 일도 자주 있단다. 1층 카페를 운영하는 교도가 "언니랑 형부 내려오면 다 내려온 거다"고 말할 정도.

"그러고보니 남편과 특별히 싸운 일이 없었네요. 혼자 무슨 일을 생각하거나 행동 할 때 아무런 걸림이 없을 정도로 남편이 늘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줬으니까요."

"아내와 같이 다니니 오해하거나 다시 설명 할 일이 없어서 편하고 행복합니다. 교당에 뭐가 필요하더라, 뭘 좀 바꾸면 좋겠다 하는 점들도 서로 알려주고 실천하니 더 좋고요."

노숙인 밥차면 밥차, 교당이면 교당, 신앙이면 신앙, 어디 하나 빠진 데 없이 알뜰한 이 부부. 원기80년대 초반, 심익순 교무 앞에서 "주인으로 주인답게 살겠다"고 한 그 약속이 늘 마음 깊이 남아있는 그들이다. "말빚 갚으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더 해야 한다"며 서로 끌고 당기는 이들에게서 몇 겁의 지중한 부부의 연이자 신앙으로 다시 만난 법정의 깊이가 전해온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