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5

▲ 김정근 원로교무
교당은 5개월 만에 기와집이 되었다. 이제 이사와 뒷마무리 외 청소, 마당 고르는 일이 남았다.

교도들은 농사일이 너무 바빠서 교당 일에는 힘들었다. 마침 부안교당 학생들이 와서 봉사해 주었다. 그리고 원대에서 또 마포로 봉사활동을 나와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두 다 사은님의 은혜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아무 지장없이 잘 마무리 되고 교당은 잘 지어졌다.

봉불식은 그 이듬해로 미루고 나는 너무 지쳐서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쓰러지기까지 했다. 봉불식 손님은 300명 정도 잡고 준비했다. 밑반찬인 젓갈도 내가 담그고 죽은 바지락으로 회는 오징어와 쭉개미로 하고 5월11일로 잡았다. 그동안 정원 나무 심고 마당은 잔디 깔고 아름다운 교당으로 가꾸고 꽃도 많이 심어서 정원을 아름답게 했다.

총부 어르신들의 참석으로 교당 봉불식은 성대하게 마칠 수 있었다. 빚도 한 푼 없이 다 갚게 되었다.
나는 나를 살게 해주신 모든 분들께 무엇을 해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광한의원에 부탁해서 소화제 200봉을 맞춰서 온 동네 집집마다 주었다.

드디어 나는 교당을 떠나면서 정말로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우리 교도들과 동네 분들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나는 부안교도님들께 정말로 감사하다. 퇴임하던 날 교도들은 찰밥과 두부를 해서 7인이 동산수도원에 왔다.

수도원에 있으면서 호주를 가게 되었다. 시드니교당 바자회를 한다고 나보고 젓갈 40킬로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 나는 걱정이 되는데 그래도 나만 믿고 오라고 하는데 할 수 없이 가야 했다. 영어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해야했다.

젓갈 40킬로 그때 만해도 내가 젊었다. 이익없이 곰소 가서 맛있는 것만 사가지고 단단히 준비하고 샘플로도 좀 따로 담았다. 그때는 김포공항에서 출발했다. 나는 그 전에 시드니 교당 봉불식 때 한 번 가서 한 달 있다가 왔다. 드디어 갈 날이 돌아 왔다. 공항에서 인명교무 언니가 나와서 짐을 부치고 나는 혼자 비행기를 타고 밤새도록 갔다. 드디어 아침이 돌아 왔다. 나는 가슴이 좀 뛴다. 단도리를 잘해서 냄새는 하나도 안났다. 줄을 서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여자가 체크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샘플을 꺼내고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 때 어느 남자분이 바로 와서 무엇이냐고 물었다. 젓갈을 나누어 먹으려고 가지고 왔다고 하고 샘플을 내주었더니 영어로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통과했다.

나는 그분께 감사를 몇 번이고 했다. 그래서 나가니까 교무님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했다고 한다. 모두가 은혜입니다. 나는 심고를 얼마나 올렸는지 모른다.

시드니교당 바자회 때 젓갈은 인기 품목으로 잘 팔렸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번을 젓갈을 가지고 갔다. 호주가서 집도 봐주고 1년씩 있다가 오기도 했다.

동산수도원에서 정화수도원으로 왔다. 정화수도원은 5인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방도 넓고 거실도 크고 모든 것이 편리하게 되어 있다. 대종사님께 큰 절을 몇 번이고 했다. 늘 감사하고 물과 불을 절약하며 살아가는 일상이다. 소중한 인연들을 날마다 보고 나는 정화수도원에 살게 됨이 행복했다. 나는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을 머리에 이고 가슴에 안고 늘 행복하고 세세생생 영생을 이 공부 이사업하기를 소원하고 마지막 갈 때까지 내 힘으로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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