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내 인생의 1순위
기도생활이 가장 큰 행복

▲ 전덕선 원무
영광이 고향인 나는 17세에 원불교와 인연이 닿아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하지만 그해 아버지를 여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 셋째 오빠의 부름으로 이듬해 광주로 가게 됐다.

오빠는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데려갔지만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집집마다 시험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금남로에 있는 광주교당을 항상 지나쳐 갔다.

하루는 그곳을 지나가는데 교당 입구 2층에 있는 종각에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고 머리를 올린 사람이 서있었다.

당시 광주교당에서 간사근무 하고 있던 정연석 교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종을 치러 내려온 것처럼 예뻤고 부러웠다.

그 길로 무작정 교당에 들어가 나도 여기 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때 이성신 교무가 교감 교무로 재직하고 있고, 정수덕 교무가 부교무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이성신 교무는 살아도 된다며 허락했다.

그래서 오빠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그날부터 교당에서 살게 됐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오빠에게 연락하니 법회를 보러 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살면서 공부를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교당에서 2년간 간사근무를 하면 학교에 보내준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에게 붙잡혀 다시 영광으로 내려가게 됐다. 내가 공부를 너무 하고 싶어 하자 어머니는 영산선원을 소개해 줬다. 그곳에서는 2년간 간사근무를 하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영산선원에서 중등부, 고등부까지 마쳤다.

공부를 마치고 나니 어머니는 전무출신은 절대 안 된다며 나를 양재학원에 보냈다. 그 후로 나는 전무출신의 뜻을 접어야 했다. 재단사로 일하며 결혼을 하게 됐고 그때 이루지 못한 서원 때문에 나는 젊을 때부터 지금까지 원불교를 내 인생의 제1순위에 두고 살았다.

가족 일보다 원불교 일이 항상 먼저였고, 법회는 안 보면 안 되는 일로 여겨왔다. 기도는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빼먹지 않고 했다. 기도의 위력인지 사업이 잘 되고, 가정도 잘 풀리고 인생의 재미를 알게 됐다. 지금도 기도생활이 가장 큰 행복이라 머무는 곳보다 기도방을 마련해 두고 산다.

나는 비록 전무출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단 한 번도 내가 교도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마음으로 교무를 보필하다 보니 누구도 내 앞에서 교무 흉을 보지 않았다. 몸은 비록 재가로 살아가지만 마음은 항상 전무출신임을 있지 않기 때문에 주임교무나 부교무나 다 똑같이 대하고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게 탄탄대로의 인생을 살다가 20년 전, 남편(김봉은 교도)이 국내에서 하던 사업을 중국으로 확장시키면서 중국 광동성 동관시에 공장을 세우게 됐다.

나는 2달에 한 번씩 중국을 다니며 남편 사업을 도왔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다니다 보니 직원들을 교화하게 되고 동관시에 있는 조선족들과도 교류를 하면서 교법을 알리게 됐다.

그리고 10년 전 조정근 원로교무가 동관시에 다녀가면서 본격적인 교화를 시작하게 됐고,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주원 교무의 권유로 원무를 서원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금은 공장 직원들이 기거하는 숙소 4층에 반듯한 법당을 마련해 일원상을 봉안하고 법회를 보고 있다. 나의 원무 활동은 이렇게 시작했다.

수원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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