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나이 46억년에 비해 인간의 일생 100년은 찰나일 뿐이고 인간의 일생 1200개월에 비해 5개월은 한순간에 불과하다.

대학시절 5개월간 대화가 통했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 북한은 독일 유학생 탈출사건으로 외국에 나갔던 유학생들을 모두 강제 귀국시켰다. 이 친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유학 중 한밤 중에 회의를 소집하고 그대로 강제 귀국해 소지품을 비롯한 책 한 권도 챙기지 못한 채 북한에 들어왔다. 함께 다니던 동기들은 이미 졸업했고, 후배들과 공부하는데 졸업 6개월 정도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 친구를 알게 된 계기는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여객열차에서다. 우린 동석하게 됐고 서로 말을 트니 집도 같은 방향이라 10시간의 긴 여행을 함께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나는 그가 유학파라서 궁금한 게 많았다. 세계정치판도와 우리나라 그리고 주변국의 문제 그의 유학생활과 유럽국들의 남한과 북한에 대한 인식, 그의 친구들 이야기 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런 인연으로 그 후 우리는 5개월간 대화친구가 됐다. 그와 나눈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 몇 가지가 있다.

우크라이나 종합대학에서 대학생들의 즉흥 연설 경연이 있었는데 이 천재적인 북한 친구가 즉석에서 논제를 제기하고 러시아어로 20분간 연설을 했다고 한다. 십여 번 이상의 박수 갈채가 쏟아지고 특상으로 종합대학총장의 만남까지 있었다.

훗날 정의감이 강하고 곧은 이 천재적인 친구는 북한의 일부 정책들을 비난하게 됐고 이런 그의 사상 때문에 북한으로 강제출국 당하여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2개월쯤 지난 후 어느 날 그는 도서실에 있는 나를 찾아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런 저런 얘기를 속삭이다 갑자기 공책의 빈 페이지에 큰 동그라미를 하나 반듯하게 그리고 이것에 대해 네 생각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종종 엉뚱한 질문을 하곤 했던 친구라서 또 뭔가 의미를 두고 묻는 거라 생각했지만 그냥 보이는 대로 동그라미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가 다시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또 단순하게 한참을 들여다보며 그가 만년필로 그은 시작점을 찾아 이것이 시작점이자 끝점이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이런 나를 한참 보더니 이 동그라미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고 또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대한 것이라 했다. 계속하여 그는 우리 주변의 가장 아름다움은 동그라미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물방울, 지구, 해와 달, 그리고 우주의 모든 이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돌고 돌아 원 하나로 원만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멍하니 한참을 반문도 못하고 허공의 잡힐 듯 말 듯한 가까우면서도 먼 신세계를 보는 듯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연공학을 공부한 나는 항상 무엇이 왜, 언제, 무엇 때문에, 원인이 뭔데? 이렇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되는 것만을 통과시켰다. 항상 의문을 던지는 일정한 규칙이 습관되어버렸는데 여기에서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5개월 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갔고 나는 1년 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격동적인 3년을 더 공부했다.

수년이 흐르고 한국으로 흘러온 작은 동그라미 물방울인 나는 거대한 원불교라는 큰 동그라미 안에 들어와 10년째 인연을 맺고 있다. 오늘의 이 인연이 혹시 그가 수년 전에 나에게 미리 보낸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한겨레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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