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대불공 47 完
경계마다 간절한 기도로

▲ 박원석 원로교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는 너무나 억울해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서부 병원으로 나를 옮겨 놓았으나 병원 의사들도 내가 경찰서에서 왔다고 처방을 하지 않았다. 이튿날 병실로 옮기고 소식을 들은 교구와 각 교도들의 주선으로 훈방되어 나왔다.

교당에 온 나는 교당 마련할 힘도 없고 어려운 형편에 처한 교당을 일으키려면 진리 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또 아파트 주인이 계약과는 관계없이 집을 원래대로 복구해 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 돈도 만만치 않고 초창기 교당의 애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최종업 주무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 달간 날마다 주인을 찾아가 계약대로 원상복구를 못하겠다고 따졌다. 그리고 한 달만에 해결을 보았다.

그리고 최 주무의 주선으로 교당을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다. 이듬해 원기59년 7월 개축을 하고 봉불식을 올렸다. 당시 내 심경은 아무도 축하해 줄 사람이 교단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필동(중구)교당이 봉불식을 올린다기에 그날 오후에 봉불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필동교당이 봉불을 미룬다기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였다. 마침 재가 교도 중 유명한 분이 열반해 교단 내 어르신이 화장터에 모두 오게 됐다. 그렇게 해서 불광교당 봉불식에 교단의 중요 어르신들이 다 오셨다. 그때 그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팔타원 황정신행 선진의 축사에서 서울교도들은 눈물바다가 됐다. 천지가 진동하는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힘이 빠져서 일어나지도 인사도 못하고 옆방에 앉아있었다. 교당 경과보고와 봉안문도 동창교무들이 대행했고 무사히 봉불을 마칠 수 있었다.

만일 당시 그러한 애로가 없었다면 2년7개월 만에 교당을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위 교당 교도는 물론 불광교당 교도들의 정성스런 성원으로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진리께서 어떠한 큰 경계를 줄 때 마다 나는 삼세의 업력이 소멸됨을 참회하고 반드시 뒤에는 온 뜻이 있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역경 난경 속에 서로 진리께서 반드시 저버리지 않고 꼭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했다.

훗날 알게 된 소식이지만 한국일보에 글을 게재한 사람은 부부가 이혼을 했다. 또 문을 부수고 소란을 피운 주민은 6개월 된 어린애를 유산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바로 우연한 인과는 아닐 것이다는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무 중반에는 서전주교당에서 근무했다. 병고로 육신은 힘들었으나 교당 증축과 청년회 결성, 연원교당인 금암교당과 팔복교당을 창립하고 교화의 꽃을 피웠다. 부산 서면교당에서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진적공하며 근무했다. 정릉과 종로교당에서는 맡은바 교화에 정성을 다했던 시기였다. 중앙중도훈련원에서의 근무는 전교역자를 만나는 기쁨, 군산교당은 교화와 기도의 위력으로 함께한 마지막 교화지였다.

퇴임 후 수도원 생활은 처음 계획한대로 조신·조식·조심의 경지에 이르도록 대종사와 정산종사 비문과 정전을 외우면서 무의식 세계까지 정화되도록 치료와 운동, 선을 반복하고 있다. 또한 해탈의 도, 휴양의 도에 순응하고 서원은 성불제중, 최후는 청정일념에 안주하도록 정진 적공하고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