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相寂滅分
爾時에 須菩提- 聞說是經하사옵고 深解義趣하사 涕淚悲泣하며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이시여 佛說如是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得慧眼으로 未曾得聞如是之經호이다

이 때에 수보리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되,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깊고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바 혜안으로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신명보시와 사구계보시의 차이점을 설하니 수보리가 법설의 참뜻을 파악하고 감격하는 대목이다.
부처님은 오안(五眼=肉眼,天眼,慧眼,法眼,佛眼)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눈과 시공을 초월한 눈,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아는 눈, 중생을 구제할 방법을 아는 눈과 이 모두를 갖춘 눈이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하리니 當知是人은 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깨끗하면 곧 실상(實相)을 내리니 마땅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줄 아나이다.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일새 是故로 如來說名實相이니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것은 곧 어떤 모습이 아닐새 이런 고로 여래께서 이것을 실상이라고 이름하셨나이다.
여기에서 실상은 진여를 말하고 진여법계의 실다운 모습이 일원상 진리이다.

신명으로 보시하면 무아가 되고, 무아가 되면 진여법계자리를 보게 된다. 이 자리는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거나 묶이지 않은 자리이다.

원불교가 좋다는 생각에 잡히지 않는 마음이라야 참된 원불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世尊이시여 我今得聞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若當來世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니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며, 받아 가짐은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만일 돌아오는 세상 후오백세에 어떠한 중생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어 알며 받아 가지면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대종사님을 직접 친견한 분들은 신심을 내기가 쉬우나 열반하시고 신심을 낸 우리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후오백세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맡은 3천년 뒤를 말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수를 맡고 출현하게 될 대종사님과 새 종교를 예견한 것이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衆生相壽者相이 卽是非相이니 何以故오 離一切相이 卽名諸佛이니이다.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如是如是하다.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이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는 까닭이옵니다. 그 까닭이가 무엇인가 하오면 아상이 곧 아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이 곧 이 상이 아니옵니다.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일체 상을 여의면 곧 부처라 이름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결론지어 말하는 것으로 부처가 되는 길은 모든 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상이 없어지면 무아가 되며, 무아가 되려면 벼락을 나에게 쳐서 내가 없어지면 부처가 되는 이치이다.

대종사님도 구인제자가 없었으면 회상을 펼 수 없었듯이 수보리 같은 제자가 있었기에 부처님이 법을 펼 수 있었다.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하라 是人은 甚爲希有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說第一波羅蜜이 非第一波羅蜜일새 是名第一波羅蜜이니라.

만일 다시 어떠한 사람이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 하지도 아니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심히 희유함이 될지어다. 어찌한 연고인고 수보리야! 여래의 말한 제일 바라밀이 제일 바라밀이 아닐새 이것을 제일 바라밀이라 이름하나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다 희유한 사람들이다.
〈금강경〉을 듣고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 희유함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 마음에 '내가 희유하다'는 상에 잡히지 않으면 된다.

〈대종경〉인도품 17장에서 대종사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고 지으면 받는 것을 알았다는 이공주의 말을 듣고 그 마음이 위험함을 경계했다. 그리고 상 없는 덕과 변함없는 복을 짓기에 더욱 꾸준히 하라고 했다. 그것이 시명제일바라밀인 것이다.

須菩提야 忍辱波羅蜜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일새 是名忍辱波羅蜜이니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을 여래가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설하기를 이것을 인욕 바라밀이라고 이름하나니라.

사람이 공부를 하려면 인욕을 하여야 한다. 인욕을 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욕은 정신수양을 통해 가능하며 바깥 경계에 부동심(不動心)을 기르는 기질수양과 오욕(五慾) 경계에 부동심을 기르는 심성수양을 같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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