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교도가 물었다. "일원상서원문은 왜 반말로 끝나? 방언공사인가 하느라 바빠서 그래?"
그야말로 '헐'이다. 답을 몰라서도 그렇지만 왜 '~함'하고 새침하게 끝나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교무님이며 교당 선배들에게 여쭸더니 그분들 답도 역시 '헐', '아 그러네?'이다.

종종 그 충격을 떠올린다. 신입은 가르쳐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배워야 했다. 교당 오래 다녔기에 바깥 시선에 깜깜하고 내부의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조직에 해가 되고 교화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 그 사실을 햇병아리 신입교도가 가르쳐준 것이다.

신입의 궁금증은 계속됐다. 왜 남자교무님들만 결혼해? 왜 저 교무님은 정복을 안 입었어? 그 월급 갖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훌륭한데 교도가 왜 줄어? 등등. 얘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순진무구한 질문들에 찔리곤 했다.

삼십년 넘는 교도이다 보니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 줄만 알고 있었다. 왜? 라고 묻는 법을 오래 전에 잊었던 거다. 교화에서도 변화나 트렌드보다는 원불교식 단어, 원불교식 스타일로만 하려고 한다. 외부에서는 원불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채 말이다.

흔히 하는 '아직 얼마 안 다녀서 그래', '몇 년 다니다보면 알게 돼' 같은 말들, 그것은 나 역시 어딘가의 신입일 때 그토록 답답해하고 싫어했던 '꼰대질'이었다. 눈치 안보고'왜?'라는 질문을 할 권리가 신입에게는 있으며, 인과와 이치에 맞게 대답해줄 의무가 교무와 기존 교도에게는 있는 것이다.

교단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세울 생각조차 못했던 강점들,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해결을 미뤄놨던 단점들을 깨쳐주는 존재, 신입교도들이 바로 그 스승이다. 교정원이나 교당에서 교화전략을 세울 때, 누구보다도 귀담아 들어야할 상대는 갓 발붙인 신입교도인 것이다. 어떤 점이 좋아서 왔는지, 와보니 뭐가 좋고 뭐는 싫은지 배우지 않고서는 더 넓은 교화란 요원하지 않을까.

4년차에 접어든 신입의 질문은 여전히 나를 배우게 한다. 주말에 일하는 친구는 언제 데려와? 진급은 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되는거야? 수위단원 되려면 뭐해야 돼? 등등. 덕분에 교전을 펴고 교단 홈페이지를 뒤진다. 나의 스승, 신입이 나를 키우고 교화를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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