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공부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참 자유는 방종을 절제하는 데에서 오고, 큰 이익은 사욕을 버리는 데에서 오나니, 그러므로 참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계율을 잘 지키고, 큰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먼저 공심을 양성하나니라."



우리 인간이 표준해야 하는 길이 두가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참자유를 얻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밖으로는 정신 육신 물질로 오직 공(公)에 바탕한 삶이다. 땅으로 인하여 거꾸러지고 땅으로 인하여 일어나듯 나로 인하여 죄도 짓고 나로 인하여 복도 짓는다. 본시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근본이며 희한한 존재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지 본능적으로 구속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을 반조해 볼 때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혀있는 자신을 한번씩 발견하게 된다. 보통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러나 그것은 방종이다. 참자유는 진리에 부합되는 생할이 되었을 때 주어진다. 무명(無明)에서 발생한 중생심으로 육근을 작용하고 나면 그 자체가 나를 이미 구속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알고 짓든 모르고 짓든 진리는 절대공정하게 인과법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법망은 시공(時空)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빠져 나올수도 없다. 욕심과 착심으로 죄를 지어놓고 진리를 속일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그물 안을 숨을 곳으로 아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누구나 낙을 좋아하고 자유를 좋아하지만 낙을 받거나 자유인이 되기 위한 행은 도무지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몰라서도 못하고 알아도 습이 되어버린 중생심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인이 되기 위한 열쇠를 내가 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게 우리네 범부 중생들이다. 무거운 삼세업장을 끌고 다니는 것이 힘들고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것 또한 달게 받고 사는 것이 중생들의 삶이다.



부처님이나 주세불의 가르침에 불보살이 되어보리라 마음먹고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뛰어오른다면 모르지만 거개는 그렇게 쉽사리 중생의 옷을 벗지 못한다. 참자유는 자신에게 철저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다. 계율로서 하라고 하는것은 철저히 행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천하사람이라도 능히 이길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다.



참된 수행자의 모습은 '자신의 계행은 소승으로 하고 세상의 교화는 대승으로'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리사욕에 어둡게 되면 그 사람의 앞길은 금방 막혀버린다. 그것이 곧 무위이화로 이루어지는 진리의 작용인 것이다. 참나를 둘러싸고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아상이나 분별주착심, 삼독 오욕으로 구속되었던 업장 업력들을 녹혀 나가고, 밖으로는 정신 육신 물질로 끊임없이 보시하며 은혜를 나투는 생활이 되어야 참 자유인, 참봉공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무아봉공이라는 삶의 표준이 있다. 진정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은 공익을 위하여 일하지 않을수 없고, 오직 공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마음의 자유를 얻었을 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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