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건 교도 / 남대전교당
새해도 벌써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여기저기서 암울한 소식이 넘쳐난다.
극심한 취업난, 장기 내수침체, 최악의 가계부채에다 기업실적 악화 등 겹겹이 절벽에 갇힌 사회다. 서민들에게 다가오는 상실감이 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이로 인한 '관계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달리 '연대와 공존의 가치'를 중시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이 무참히 짓밟히면, 당사자로선 그 여파가 작지 않다. 가족의 연대의식이 희박해지는 가운데 개인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국가로부터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신감이 깊어간다.

이게 바로 이 시대를 읽을 수 있는 키워드다.

우리나라는 여러 지표상 삶의 질이 좋지 않은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5 삶의 질' 보고서를 보면 우울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공동체나 가족과의 유대가 심각할 정도로 악화돼 있다. 자신이 어려울 때 의지할 친구나 친척이 있는가를 측정하는 '사회연계지원' 점수가 72.37점으로 OECD 평균(88.02점)에 크게 못 미친다. 회원국 가운데 꼴찌다.

그밖에 여러 조사의 공통점은 개인 고립감이 더 커지는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진다. 노령층일수록, 소득과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육체노동자일수록, 임시직일수록 불안점수가 높아진다.

취약계층일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게 작용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감보다 그게 더 크다. 작용하는 요인을 외부 탓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 노인자살률이 각각 1위의 부끄러운 기록을 갖고 있다. 2년 후면 고령사회, 2026년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고령 사회를 맞을 준비가 부족해 보인다. 노인 4고(苦)로는 빈곤, 질병, 고독, 무위가 꼽힌다. 65세 이상 고령자 4명중 3명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저출산-고령화 사회, 노인에게는 희망이 없는 사회다.
청소년들의 사정 또한 다를 바 없다. 청년 실업률이 10%에 육박한다. 역대 최악 수준이다.

체감실업률은 이보다 3배로 추정된다. 청년 10명 가운에 3명이 실업으로 사회와 단절돼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이 나래도 펴지 못한 채 절망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는 그들의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니 가족 간 유대도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주요국가의 SNS와 뉴스에 나타난 행복과 불행의 연관어를 빅데이터로 최근 분석한 결과를 보니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는 가족, 사랑, 감사, 엄마라는 단어가 행복과의 연관어로 나타났다. 행복의 조건으로 가족을 꼽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인의 가족의존성을 감지할 수 있다. 한국인의 행복감은 먼저 가족 중심의 1차 집단과의 관계에서 파생되고, 그 다음으로는 2차 집단인 사회와의 관계에서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쓸쓸하게 죽어가는 도시의 군상(群像)을 본다. 옆집에서 누가 아파서 꼬꾸라져도 등을 토닥여 줄 사람조차 없다. 누군가는 '외로운 영혼이 모인 도시'라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평온할리 없고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구상 그 누구도 여섯 사람 단계만 거치면 서로 아는 사이다. 이른바 6단계 분리 이론(six degrees of separation)이다. SNS 확산 이후 그 간격이 더 좁혀지고 있는 추세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다층 복합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지만 스스로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군중속의 심리적 고독과 소외감을 토로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세계는 하나다. 만유가 한 체성이다. 만유는 인연의 고리,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의 관계로 연결돼 있다. 나의 작은 몸짓 하나가 모든 인연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상생선연으로 우뚝 서려는 지혜와 힘을 갖추는 일이 시급하다.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가. 우리 모두 부처다. 나도 부처다.

큰 우주의 본가 살림을 할 수 있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하여 나 스스로 복을 장만하고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는 일, 여기에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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