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택 원로교무
16장은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어떤 위력이 있는지 알려주는 장이다.

착한 사람은 손해를 본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으나, 선업을 쌓고 업장을 녹이는 일은 삼세인과를 믿고 실천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復次須菩提야 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호대 若爲人輕賤하면 是人이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련마는 以今世人이 輕賤故로 先世罪業이 卽爲消滅하고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라.

"또한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되 만일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선세(先世)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련마는 이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를 받는 고로 선세 죄업이 곧 소멸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대종사님도 정업은 부처님도 상쇄(相殺)하지 못한다고 했다. 업을 받을 때에는 달게 받고 다시 짓지 아니해야 한다.
그러하기로 정당한 고락과 부당한 고락을 잘 알아야 하고, 낙으로 변할 고인지 고로 변할 낙인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한탄을 하고 원망을 하게 된다. 경을 수지독송하는 이유도 은혜를 입고 진급을 하기 위함이다.
같은 업을 지었다 할지라도 진급이 된 사람은 가볍고 쉽게 받고 강급이 된 사람은 무겁고 어렵게 받는다.

須菩提야 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하니 於燃燈佛前에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하야 悉皆供養承事하야 無空過者호라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겁(阿僧祗劫=無數劫) 일을 생각하니 연등불 앞에 팔백 사천 만억 나유타(那由他) 모든 부처님을 얻어 만나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서 한 분도 빼놓은 일이 없었노라."

'아승지'는 셀 수 없다는 뜻이며, 나유타는 천억에 해당하는 큰 숫자 개념이다.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었다는 것은 처처불상 사사불공 했다는 뜻이다.

若復有人이 於後末世에 能受持讀誦此經하면 所得功德이 於我所供養諸佛功德으로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로 所不能及이니라.

"만일 다시 어떠한 사람이 있어, 이 후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는 공덕이 내가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한 바 공덕의 백분에 하나도 미치지 못하며 천 만 억분과 내지 숫자의 비유로는 능히 미치지 못할지니라."

이는 부처님이 겸손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실지 그렇다. 어떠한 공양일지라도 진리를 깨닫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須菩提야 若善男子善女人이 於後末世에 有受持讀誦此經하는 所得功德을 我若具說者면 或有人이 聞하고 心卽狂亂하야 狐疑不信하리니 須菩提야 當知하라 是經은 義도 不可思議며 果報도 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이 후 말세에 능히 이 경을 받아 가지며 읽고 외우는 이가 있어서 얻은 바 공덕을 내가 다 말하면 혹 어떠한 사람이 있어 듣고 마음이 곧 어리둥절하여 여우같이 의심하고 믿지 아니할지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불가사의하며 과보도 또한 불가사의하나니라."

대종사님은 원기 100년 안에 들어온 사람은 "과거 전생에 나와 약속한 사람들이다"고 했다. 지금 시대 공부법은 부처님을 빙자하여 생활 방편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공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삼세업장을 소멸하자는 것이다. 삼세 업장 소멸은 심신작용을 잘해야 한다.

'나는 안 된다'거나 '나는 복도 지지리도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세 한탄의 수준에서는 고해의 바다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수도 생활과 속 깊은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업에 끌려 다니게 된다.

대종사님도 우연한 고락은 절대 없다고 했다. 삼세 이치를 알고 보면 다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 것이다. 그래서 정산종사님도 앙급자손(殃及子孫)이 아니라 실은 앙급자신(殃及自身)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금강경을 공부하는 우리는 지금 불가사의한 뜻을 공부하고 불가사의한 공덕을 쌓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爾時에 須菩提-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善男子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한 이는 云何應住며 云何降服其心이니꼬.

"이때에 수보리 부처님에게 사뢰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이는 어떻게 주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질문하는 것은 답을 알면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 방식을 선문답이라고 한다. 의심을 내면 의심 자체에 해답이 담겨져 있다.

왜냐하면 물어본 사람은 이미 어떻게 마음을 주하고 어떻게 항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문답은 혜두를 단련하는 것으로 원불교에서는 의두성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방법으로는 경전을 읽고, 마음으로 궁글리고, 말로 표현하며, 글로 쓰는 것이다(일기).
이 방법으로 꾸준하게 연마하면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골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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