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화 이야기 3

▲ 김하은 교무 / 베를린교당
지난해 4월1일 교당을 이사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긴 여름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9월5일 봉불식! 한바탕 큰 폭풍우 같은 바람이 지나갔다. 독일의 이웃 교당 및 아프리카와 프랑스에서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먼 길도 마다 않으시고 60여분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스러운 봉불식을 마쳤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제 마음대로 목탁을 쳐도 되고. 마음껏 좌종을 울려도 된다. 신앙과 수행을 함께할 수 있는 활불의 도량이 만들어지고, 누군든지 언제든지 쉬어 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처가 준비됐다.

매주 법회에 8~10여명의 현지인들과 한인이 오간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오고 원음방송에서 실습을 하고 돌아온 루이스도 케이크 하나를 들고 늘 함께하고 있다. 아직 서툴지만 루이스가 번역한 독경집을 보며 한 음절 한 음절 한국어 발음으로 독경을 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이 그저 대견하고 소중하다. 법회 후엔 교당이곳 저곳 손봐줄 곳을 들러봐 주고 기타도 치고 노래 부르고 윷놀이도 하며 정담을 나누고 저녁까지 먹고서야 돌아간다. 한국에서 독일에서 여행 다니러 오는 지인들이 교당에 와서 머물고 가곤 한다.

가을엔 낙엽과의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정원에 나무가 많아서 낙엽 치우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기는 낙엽을 마음대로 태울 수도 없고 내다 버리는 데도 큰 봉지에 담아서 가져 가야하고 또한 버리는 비용도 내야 한다. 자동차도 없고….

자동차를 하나 구입하려다가 교도 전체 회의를 통해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감당해낼 만한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직 작은 규모에 새로 시작하는 원불교 베를린 교당 사업이지만 늘 교도들과 상의하고 결정한다. 낙엽은 학생들이 와서 치워 주었고, 봉지에 담아 놓으면 이웃 독일인이 종종 자신의 차량으로 가져다 버려주는 은혜를 입었다.

또한 우리 독일인 교도들은 전생에 대종사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분명한가보다. 하나같이 김치를 그렇게 좋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또 은혜로운 것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농장 사장님이 무와 배추, 갓 등을 많이 줬다. 김장을 해서 교도들과 학생들에게 나눠 주고 냉장고가 부족하여 정원 한쪽 땅 속에 묻었다. 겨우내 먹을 양을 준비했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무인 나에게 있다.

1년여 동안 집을 구하러 다니느라 민박집을 전전하느라 애태우고, 새로운 교당 터전으로 이사한 후엔 5개월 후에 맞이한 봉불식을 준비하느라 날마다 일 속에 파묻혀 지내야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과, 교당 공사를 맡은 독일인 현지 일꾼과의 마찰 속이 눈 돌릴 수 없어 늘 함께 붙어 일을 하다 보니 힘에 벅차고 애는 타고~~ "한 번 봉불식 하려면 삼세 업장이 녹는 다더라"라는 스승님의 위로의 말을 실감하며 불단 앞에서 펑펑 울기를 몇 번이었던가. 그렇게 했는데도 미처 다 정리되지 못한 채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무사히 봉불식을 마치게 된 것에 감사하며 지친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돌아보니 꿈같은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이러한 과정동안 오직 마음은 교당 이전과 공사현장에 가 있었고 오직 이것만을 위한 서원과 감사 기도가 있었을 뿐 나 자신을 위한 신앙 수행을 게을리 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인해 손가락 마디마디 손목과 발목 관절이 굽혀지지 않을 만큼 아팠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저축해 놓았던 삼대력이 모두 고갈되었음을 느꼈다. 허전하고 텅 빈 이 느낌은 무엇인가! 마음을 챙겨 법당에 앉아 집중을 해도 단전에 힘이 없었다. 마음은 시선을 따라 자꾸만 정원으로 향했고 '저것 좀 더 해야겠네, 아이고 저것도 좀~.' 이렇게 내 마음은 이미 정원일과 집 내부 수리하는 일에 몸도 마음도 길들여져 있었던 거다. 선(禪)은 커녕 집중도 안 되고 자꾸만 일어나 정원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붙잡아 앉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뿔싸! 원불교100년성업봉찬도 중요하지만 자신성업봉찬이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머리에 불붙은 듯 다급하고 한편 안타깝고 속상했다. 법회를 보려는데 부끄러운 마음에 눈물이 펑펑 나왔다. 이러고도 원불교 교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고도 따뜻한 공간에서 공중의 밥을 먹을 자격이 있을까? 한없이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대종사님 제자가 아니던가. 희망이 끊어지지 않은 이상 나는 다시 서리라.' 다짐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다. 새벽 정진부터 시작하여 수양 연구 취사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유무념표를 만들어 붙이고 혼심을 다하고 재정비하는 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쉬지 않고 뚜벅뚜벅 나아가리라. 항상 감사한 나날이다.

아울러 이곳 베를린에 정착한 많은 난민들이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난주엔 난민 수용소에 다녀왔다. 우리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점검하고 돌아왔다. 교도들과 상의하여 움직여 보려 한다. 은혜를 서로 나누기 위해. 다시 한 번 이곳에 베를린교당이 자리 잡도록 애써준 분들의 앞날에 세세생생 거래 간에 혜복의 문로가 열리기를 늘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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