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적 교도 / 강남교당
원기 100주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원불교 100년을 돌이켜 보면 기적과 같다. 소태산 대종사가 영광의 작은 마을에서 대각하고 원불교를 창시하여 100년이란 짧은 시간 내에 우리나라 4대 종교로까지 성장시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대종사는 이적을 멀리했고, 고행을 금했고, 나를 믿으면 극락 간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산속에서의 편벽된 수행방법을 피하라고 했다.

대신 대종사는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재가와 출가도 구분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만나는 바로 이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줬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 진급하고, 그렇지 않으면 강급하는 것이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서로 돌고 돈다고 했다. 그래서 차별 없고, 극단적이지 않게, 타력에 의하지 않는 그런 원만한 신앙법을 강조했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무한해 보이는 뭔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민족별로 수많은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발전시켜 왔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도록 불교가 우리 사회의 중심사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500년 동안 성리학이 중심사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가 그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중심 사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있다. 자살, 테러, 살인과 같은 흉악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흉악한 범죄가 슬금슬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또 정치, 사회, 지역, 연령, 성별, 소득별로 서로 나뉘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을 하고 있다. 사회 전체가 통합의 구심력은 없고 확산의 원심력만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내재된 문제들이 원만히 해결될 리 만무하다.

국가적인 이슈가 있었을 때 우리는 소통하고 대화하고 끝장 토론하면 합의점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능력은 한계에 도달한 느낌이다. 합의점을 찾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우왕좌왕하다 마는 꼴이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틀린 것인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자만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여기저기서 서로 다투고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 안정과 구성원의 행복을 보장 받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좀 더 번영된 국가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긴 하는 걸까.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분열되고, 국가적 목표가 불분명하고, 도덕과 윤리가 위태로울 때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국가에 헌법도 있고, 법률도 있고, 규범도 있지만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에 보다 근본적인, 보다 사람 지향적인, 보다 미래지향적인, 그런 중심사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새로운 100년대를 열게 될 원불교는 그 중요한 시점에 놓였다. 원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내세를 강조하지도, 창시자를 신격화하지도 않았다. 가정을 등지고 외진 곳에서 고행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천지·부모·동포·법률이 죄복의 근원임을 깨치도록 했다. 그리하여 서로 진급이 되고 해독을 입지 않는 상생의 법을 가르쳤다.

기성 종교는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엄숙한 성당과 엄청난 교회와 궁궐 같은 절들이 널려 있지만 어느 누구도 원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의 하나는 타력신앙에 있다.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면 그 신앙이 깊을수록 분열을 더 심해지고 서로를 배척하게 된다.

서울교화시대를 준비하는 교단이 단순히 교도 수 늘리는 교화를 넘어 우리 사회의 통합과 국가적 발전과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기점이 되길 바란다. 초연결사회에서 교법이 중심사상이 되고 교단이 중심종교로 자리 잡을 그런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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