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자의 삶

▲ 길혜선 정무/통영교당
나에게는 원불교에서 이름 뒤에 불러지는 호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길혜선 정토' 또 하나는 '길혜선 정무'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도님들은 정무라는 단어를 생소해 한다. 그것은 잘 불러지는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무제도는 원기97년에 시작됐다. 4명의 정토가 발기인으로 시작됐으니 그 규모나 역사는 갓 태어난 영아기라 할 수 있다. 아기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부모의 사랑과 정성으로 성장하듯이 정무가 교화현장에서 성장하려면 관심과 격려가 필요하다. 가끔 '정무를 왜 하게 됐는가' 하고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받은 그 질문들 속엔 각각의 다른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우리 교단에 정무라는 또 다른 직책이 필요한가? 아님 왜 정토가 교당에서 살지?' 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으나 무응답으로 회피한다.

아무튼 난 정무라는 칭호를 받고 교화현장에 합류하고 있다. 정무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등 떠밀려 '어어!'하다가 풍덩 빠진 교당생활이 8년째를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짐 보따리를 쌌다가 다시 풀렀다가를 반복하면서도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업력인가 보다.

이렇게 좌충우돌하며 처음으로 하게 된 교당생활은 서울교구 대치교당이었다. 간섭과 구속을 받기 싫어하는 성격에 교당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후회를 했다. 내 머리로는 이건 아닌데 하면서 발은 문턱을 넘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육체와 영혼의 두 갈래로 서로 당기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왜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물속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가 누군가가 물을 확 끼얹어 내 옷의 일부가 젖어버렸을 때, 에라이~ 하면서 아예 물속에 풍덩 몸을 던져버리고 물속에서 같이 놀아버리는 것, 그런 것이다. 그렇게 정무라는 것을 하게 된 계기가 돼 버렸다.

하지만 아직 영아기라고 하듯이 갈팡질팡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순서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그 순서를 잊게 한다. 왜냐하면 정무의 업무가 광대무량(?!)하기 때문이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함께 붙는다는 것은 답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아니 답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 것이다.

나의 희망과 꿈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고, 또한 중생제도 하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다만 남편 교무가 간절히 원해서 이루어진 정무생활이었다.

따라서 나의 정무생활의 시작은 시간의 뒷 꽁무니만 쫓아가는 나날이 되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교무가 시키는 일은 차선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우선이다 보니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교무와의 충돌에 번개와 천둥소리가 나기도 했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영어공부와 꽃꽂이, 그리고 뜨개질 강좌와 아로마테라피였다.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는 꽃꽂이 강좌에 시간 투자를 2년 넘게 했다. 교당에 뜨개동아리가 생겨서 뜨개강좌에도 시간을 투자를 했고, 아로마테라피 강좌에도 시간투자를 했다. 또한 정무는 원불교학 전공을 했으면 하는 교단의 바램에 원광디지털대학에서 원불교학 공부도 하게 됐다.

처음엔 메론 겉껍질처럼 마구 엉켜있던 시간을 케이크 조각내듯 먹기도 좋고 보기도 좋게 하듯이 시간 관리를 하게 되었다.

다음엔 교당교화에 협력하고 있는 좌충우돌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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