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그 일을 서둘러 시작한다는 의미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와는 반대로 '강 건너 불 보듯 한다'는 말도 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남의 일에 너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때 쓰는 말이다. 조직이나 구성원간의 관계에서도 간절함과 무관심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조직 역량을 극대화하거나 구성원 참여를 이끌어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런 이질적인 듯한 두 요소가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 '광장'이다. 간절함과 무관심이 광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역량의 극대화와 참여의 동기를 만들 수 있다. 광장은 개방된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광장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환호하는 공동체 의식의 집결지이고, 교감과 소통의 장소로 인식되는 공간문화의 장이다. 광장은 열린 공간이다. 남녀노소, 선악귀천, 빈부나 지위의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교당이라는 공간이 교단 구성원이나 이웃에게 가치 있는 장소로 자리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요가나 마음공부 등 지역밀착형 교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맞춤형 교화전략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은 참여공간이다. 사회적 논쟁이나 조직문화에 대한 의견을 누구나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가진 문제가 간절하다면 이 공간을 통해 적절히 표현하고 대중의 의견을 경청하거나 내 의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가진 생각과 의견이 다른 구성원들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서로가 인식하고 수정하는 과정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경청이 필요한 것이다.
교화의 공간에서도 참여의 문화가 더 적극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집회의 성격이 일방적이면 활력이 떨어지고 생산성이 감소 될 수 있다. 구성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찾아 참여하는 공간을 창출해 내는 배려, 이것이 미래형 교화모형 개발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리고 광장은 소통의 공간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과 알지 못했던 구성원들과의 교감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관심을 갖게 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 광장을 통해 간절함이 결실을 맺고 무관심이 참여로 돌아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이 생략되거나 부실하면 구성원들 간의 이질화는 고착화되고 동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는 투명성과 공의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투명성은 순수성이다. 의롭지 못한 힘이나 세력에 의지하려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공의는 대중적 합의에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논의 구조에서 어떤 경우는 9대1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4.5대5.5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라도 공의가 존중되고 합력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건전한 광장문화를 형성해 갈 수 있다.
이 광장은 다양한 생각들이 교감과 논쟁을 통해 간절함을 호소하고 왜곡된 것을 표출하는 곳이며 공의와 합의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목표를 창출해가는 공간이다. 이 과정들이 건전하게 승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과 구성원이 견지해야 할 기본자세가 필요하다. 균형감과 신뢰감이 그것이다.
균형은 조건과 성격이 서로 다른 대조적인 것들이 안정된 통일감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하는 자세를 말한다. 일방적인 강요나 왜곡된 정보의 유입을 통해 특정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자세는 균형감을 상실한 것이다. 진보와 보수, 지방과 중앙, 개인과 단체 등 다양한 계층과 이념간의 요구와 생각들 속에서도 균형감을 유지하면서 경청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뢰는 상대를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상대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위는 억제되고,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해도 끝까지 경청하고 협조할 자세가 된다. 그래야 조직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의 낭비를 예방할 수 있고, 구성원들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광장의 공간적 개념이 아날로그식이든 디지털 형식이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광장이라는 문화공간에서 이뤄지는 참여와 소통을 통해 간절함과 무관심이 균형과 신뢰라는 틀 속에서 결실과 참여라는 접점을 찾아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원불교 2세기의 건강하고 창의적인 희망 찾기가 되도록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고, 교정의 역할이 세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류경주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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