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원리 효과 얻으려면
응용과 수증 단계 거쳐야
문화시대, 대중과 호흡 중요

▲ 홍성문 교도/원남교당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에서 만유인력의 존재를 발견했다. 당연하게 보고 넘길 수 있는 자연현상에서 그 속에 내재된 진리를 법칙으로 나타낸 것이다. 뉴턴은 또 어떤 물체에 가해진 힘(F)은 그 물체의 질량(m)과 가속도(a)의 곱으로 나타난다는 운동의 제2법칙을 발견했다.

법칙이란 공간적인 보편성(Everywhere)과 시간적인 연속성(Anytime)을 갖는다. 뉴턴이 발견한 운동의 제2법칙 F=ma라는 공식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식의 의미를 완전하게 알기는 상당히 어렵다. 공학도인 나는 대학시절 이 단순하게 보이는 운동법칙을 수많은 문제를 풀어보면서 그 속에 내재된 물리적 의미(Physical Meaning)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적이 있다.

단순한 법칙이라도 그것이 실제로 현실에 작용하여 나타날 때는 굉장히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진공과 묘유가 아닐까? 대(大)자리는 좀 알 것 같아도 소(小)자리와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묘유 자리를 주물럭주물럭해서 완전히 토를 떼기는 참 어렵다. 마치 달(月)이 뜨면 해(日)가 사라지고 해가 뜨면 달이 사라져 버리듯 인이 있을 때 과는 나타나지 않고 과가 올 때에 인은 이미 보이지 않으므로 인과의 원리를 사실적으로 알고 실천하려면 내외가 그림자 없이 훤하게 밝은(明) 만상자연명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사실 인이 곧 과요 과가 또한 인이 되는 순환의 원리 속에서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지만 그것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교화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종사가 밝혀준 교법이 있다. 바로 삼학팔조 사은사요이다. 그러나 그 교화의 원리를 실생활에 적용하여 효과를 얻으려면 수많은 예시와 수증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 인생은 각자가 무대의 연기자이자 동시에 연출자이고 연출자이자 동시에 무대의 연기자이다. 연출의 원리는 인과의 원리이고 우리 각자는 자기 삶의 연출자이며, 경영자라 할 수 있다.

대종사가 밝혀준 구세의 교법 삼학팔조 사은사요도 더 많은 경우의 수로 응용과 수증이 필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공유되도록 해야 할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답은 세상의 모든 문제 속에 내재한다. 문제인 동시에 답이고 답인 동시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 공안으로 '내가 나의 눈을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있다.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방법, 그것은 어떠한 것인가? 교화의 비답은 문젯거리가 더 많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특수성 그것은 한때 서울공화국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적이 있었다. 그 뒤에 지방분권화 시대가 있었고 현재도 지방균형 발전은 중요한 진형행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과 종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대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그러한 문화 인프라의 집중이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대도시 특히 수도 서울이 문화예술의 중심축이요 성장기반이 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됐다.

현재 지구촌은 이른바 문화의 시대로 가고 있다. 문화는 각자의 삶이 서로 소통하면서 자연히 생성되어진 소리와 빛의 무늬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많은 대중들이 서로 호흡하고 교류하면서 만들어 내는 일상의 하모니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의 가치, 희망과 니즈(Needs)가 이 하모니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언제든지 하나로 묶어내는 놀라운 힘도 가지고 있다. 반면 현대의 종교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현실문제의 해결에 모두가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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