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여원 기자
치타델레는 독일어로 '요새안의 독립된 작은 보루, 내성(內城)'을 뜻한다. 성안에 숨겨진 작은 방이라는 의미다. 개인의 고독, 성찰, 내면과 연관이 있는 치타델레, 요즘 부쩍 생각하게 되는 단어다.

치타델레는 괴테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다. 괴테는 작가로서도, 행정가로서도 명망을 얻었지만 그럴수록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 성찰을 집대성한 작품으로 파우스트를 들 수 있다.'가장 행복한 인간은 그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무엇으로 어떻게 연결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들려주는 목소리는, 괴테만의 고독이자 내적 자아와의 대면이다.

괴테가 말한 치타델레를 인생의 한가운데로 들여놓은 사람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몽테뉴. 그는 치타델레를 상징적으로 현실에 끌어들였다. 38살에 세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은퇴한 몽테뉴는 자신의 영지에 혼자만의 성채를 만들었다. 1000여 권의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그곳을 몽테뉴는 치타델레라고 불렀다. 치타델레에서 몽테뉴는 10년 동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며 치열한 독서와 글쓰기를 했다. 그렇게 몽테뉴는 저택 안에 독립된 3층짜리 원형탑(치타델레)에서 불후의 명작인 '수상록'을 집필했다.

숨김과 어둠 그리고 외로움의 공간이었던 치타델레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여전히 혼자만의 공간인 것은 분명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곳이 아닌 오히려 있고 싶은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다. 치타델레가 소외가 아닌 나만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것은, 혼자건 여럿이건, 잘 사는 것에만 주목해왔던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공간의 별채성을 일상의 시간 속에서 찾아본다. 하루 시작과 끝을 감사드리는 조석심고, 두 손 합장으로 나를 다지는 짧지만 정성스런 시간이다.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멈추는 잠깐의 점심 행선, 자연 속에서 나를 위안하는 시간이다. 조명 빛과 소리를 차단시키고 올리는 108배 정진기도, 나로 인해 아파하는 이들에게 참회하는 고해의 시간이다. 근기 따라 깊어지는 명상과 기도 또한 정체성을 잃지 않는 자아, 그 내면의 성찰을 위한 나만의 치타델레가 아닐까.

혼자만의 별채가 아니어도 좋겠다. 고단한 마음을 위로할 좋은 영화 한편, 좋은 책 한 권도 좋겠다. 때론 너그럽게, 때론 치열하게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는 일, 그렇게 치타델레를 나를 위한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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