須菩提야 汝勿謂如來作是念호대 我當有所說法이라하라 莫作是念이니 何以故오 若人이 言호대 如來有所說法이라하면 卽爲謗佛이라 不能解我所說故니라 須菩提야 說法者는 無法可說일새 是名說法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내가 마땅히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 같은 생각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이러한 생각을 하지 말지니 어찌한 연고인가? 만일 어떠한 사람이 있어 말하되 '여래가 설할 법을 가지고 있다'하면 곧 부처를 비방함이라 능히 나의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가히 설할 법이 없을새 이것을 설법이라 이름하나니라."
이 부분이 담고 있는 의미를 풀어보면 첫째, 진체(眞體)는 이언(離言)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다. 진리의 체자리에서 보면 말하는 사람도 말을 듣는 사람도 없기에 대소멸문이라 한다. 여기가 극락자리로 왕생극락이라는 것은 진리의 체자리에 합일하라는 뜻이다. 동시에 유무초월의 생사문으로 유무는 춘하추동 생로병사의 변화를 뜻하며, 유무를 초월하여 만물을 생성해 내는 대생성문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활동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대종사는 무시선 무처선에 중점을 두었다.
두번째 부처님은 고정된 법을 설하지 않는 것으로 부처님은 늘 대기설법을 한다. 대기설법이란 준비하여 고정된 설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기틀을 보고 하기 때문에 설한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세번째는 법설을 하고도 설한 흔적이 없다. 성현은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항상 맑은 지혜가 나온다. 다 잊어버린 명경 같은 성품에서 그 당시 상황에 따라 말하는 것이 설법이 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슬픈 마음 즐거운 마음을 마음에 담고 있어 찌꺼기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업이다. 따라서 잘 잃어버리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이다. 잘 잃어버리고 삼심(三心) 불가득이기 때문에 무법이고 설법을 하고도 상이 없기 때문에 시명설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爾時에 慧命須菩提-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頗有衆生이 於未來世에 聞說是法하고 生信心不이까 佛이 言하사대 須菩提야 彼非衆生이며 非不衆生이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衆生衆生者는 如來說非衆生일새 是名衆生이니라
"이 때에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혹 중생이 있어 미래 세상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그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어찌한 연고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란 것은 여래가 중생이 아니라고 말할새 이것을 중생이라 이름하나니라."
미래세에 법설을 듣고 신심을 내는 사람, 말법세에 신심을 내는 사람은 엄청난 성인인데 바로 대종사이다. 여기에 중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중생이란 뜻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부처와 구별되는 상대성의 중생을 말하는 것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중생을 말하고, 또 하나는 부처와 구별되지 않는 중생이 있다.
〈대종경〉에 보면 진급하는 사람과 강급하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결과적으로 공부하는 이유는 진급이 될지언정 강급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대종사는 부처와 중생을 구분하지 않는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처처불상 사사불공으로 모두가 다 부처이고 모든 것에 다 불공을 하게 했다. 그런 부처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이 사람 부처님으로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잘 발현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불공이다.
須菩提- 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佛이 得阿耨多羅 藐三菩提는 爲無所得耶이까 佛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다 須菩提야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乃至無有小法可得일새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은 바가 없음이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도 가히 얻음이 없을새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나니라."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습관적으로 내기 때문에 마음을 보지 못한다. 견성이란 마음을 챙겨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마음을 챙기는 공부를 유념공부라 하고 챙기지 않아도 될 때 까지 하는 것이며,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무법가득을 실천하게 된다.
챙기는 공부의 구체적인 것은 취사공부로 취할 것은 취하고 놓을 것은 놓는 공부를 하는 것이고 이 공부는 연구공부가 바탕이 되어져야 한다.
판단과 취사는 순간적으로 이뤄지는데 이 공부를 계속하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며 무법가득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조그마한 법이라도 얻은바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 경지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이 대목을 야부선사는 구인불여구자기(求人不如求自己 사람을 얻으려고 하매 자기를 얻음과 같지 못하다)라 하였다.
어떤 조직 단체든지 운영을 혼자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얻어야 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얻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얻지 못한다.
대종사도 대각을 통해 당신 스스로 당신을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대종사도 구도하면서 수많은 법마와 싸웠는데 그 때마다 소법이 얻어진다. 법마상전급에서 아만심을 내지 말라는 것도 공부하면서 소법을 얻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데 이 아만심이 들어서 삼독심인 탐진치로 발전하게 된다. 삼독심을 없애려면 아만심을 제거하고 아상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무아가 되고 무아가 되면 무법가득이 되는 것이다.
이성택 원로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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