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효천 교무/군종교구
1919년 3월1일, 이날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강력히 항거하기 위해 만 백성들이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일제에 항거한 날이다.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독립을 향한 열망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총궐기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겨 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이 올해로 97주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의 우리는 3·1절을 맞이하는 의미가 약간은 다른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올해 3·1절은 징검다리 휴일이라는 이름으로 고속도로 정체의 문제가 뉴스에 나오고, 언제부터인가 10대들의 폭주족 단속이 단골 소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누구나 3·1만세운동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일본군의 총칼앞에 잃게 되고, 만세운동을 하다 옥에 갇혀 죽음을 맞이 한 사람.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지는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순국할 때 나이가 18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다. 그 어린 나이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 진지하고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한 교도가 정산종사께 기미년 만세 운동 때 대종사께서 시국에 대하여 특별히 하신 말씀은 없었냐는 질문에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 소리니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 드리자" 하셨다고 답한다.(〈정산종사법어〉 국운편 3장)

원불교는 1916년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으로 시작하여 1919년(원기4년) 표준이 될 만한 제자들과 3개월 동안 대기도(大祈禱)를 올리게 된다. 지금은 원불교가 4대 종단으로써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남 영광이라는 시골 한편에서 이제 막 활동하기 시작한 생활공동체 규모의 단체이기에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인적, 물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3·1운동에 대해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소리'라고 하시며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작의 표현으로 보셨다. 그리고 우리의 할 일은 오롯한 기도를 통해 정신적 부분의 개혁을 강조하셨다.

이후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심경으로 법인성사라는 이적을 낳게 되고 원불교는 나를 놓고 공익을 위해 힘쓰는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정신이 확고히 다져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역사 속에 수 많은 순국선열의 희생으로 오늘날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들은 어떠한 마음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18세의 어린 소녀가 상상하기 힘든 고문 속에서 이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결국 무아봉공이라는 거룩한 마음과 실천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순국선열들의 무아봉공이라고 하는 거룩한 정신을 본받아 봄기운 가득한 3월의 새로운 날을 맞이하여 그 감사함을 더욱 가슴에 새기고 더 큰 가치를 위해 나의 마음을 대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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