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 홍일심 교도/원불교여성회장
교단 100주년, 원불교 여성회 20주년을 맞아 여성회 소식지 209호까지를 훑어보니 몇 번의 건너뛰기는 있었지만 경험 없는 전업주부들의 손으로 만들기 시작한 소식지가 20년간 맥을 이어온 것도 대단하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왔을까 스스로 감격스럽기도 하다.

처음 원불교여성회가 창립되었을 때 우리의 목표는 '교리의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을 시작하려 하니 종교 간의 벽은 의외로 높았고 여성특별위원회를 거쳐 탄생한 여성부에서는 종교단체는 여성단체로 취급할 수 없어서 여성부에 가입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등에 '원' 자를 선명하게 붙인 여성회원이 되겠다고 나선 우리들은 여성부 가입을 포기하고 종교가 없어도 선량한 삶을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종교의 배타성을 개탄하는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한울안운동을 제창했다.

"어느 성인도 예외 없이 더불어 잘살라"고 가르치셨건만 현실은,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가장 끈질긴 싸움이 종교전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전 인류가 한 울타리 안의 한 식구로 살아가도록 종교의 울을 넘어 협력하자"는 한울안운동의 취지는 상당한 호응을 받아 당시 6대 종단 여성대표와 2천여 명의 환영 속에 출범하고 2년 후엔 사단법인으로 설립됐다.

처음부터 범종단 공익운동으로 출범하여 후원자도 비교도가 상당수였고 지원의 대상도 세계가 대상이었다.

여성회가 세계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여성회가 UN NGO 가입을 목적하고 활동해오는 가운데 UN의 새천년 개발계획에 의하면 빈곤퇴치의 최우선지역이 아프리카임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남아공에서 이미 10여년간 활동하는 김혜심 교무님이 있어서 곧 스와질랜드 돕기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쳐 우물파기와 어린이집, 여성자립센터, 그리고 직업교육용 빵공장 설립의 지원을 마치고 그 후 한제은, 한수녕 남매 교무님이 케냐 부임을 하게 됨을 따라 한울안운동의 지원은 케냐로 이동하여 코이카의 다년도 지원금도 받고 지금까지 활발한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금년도에는 코이카 우수사업 사례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한울안운동의 지명도도 차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케냐에서는 정식 선교허가도 받고 정부 공인 NGO로 등록되어 정부차원의 혜택과 보호를 받고 있다.

금년에 교당 부지가 마련되는 대로 교당을 건립하면 현지인 교화의 전망도 매우 밝아 보인다. UN에서조차 아프리카 돕기는 사막에 물 붓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헌신하는 교무님들이 있기에 비교적 낭패 없는 사업을 지속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아프리카 사업 말고도 한울안이 있어 원불교라는 이름으로는 받기 어려웠던 상당액의 국가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사업이 남원의 다문화가정 지원사업이었다. 특히 가요대회 일색이었던 다문화가정 문화행사를 '우리말 말하기대회'로 전환 확산시킨 일은 한울안운동이 이뤄낸 공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껏 해온 일 자체보다도 한울안운동의 교단적 의의는 딱히 원불교의 이름을 걸지 않고도 원불교 교리의 실천에 일반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포교성 사업이 아니라 인도적 실천이고 정성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여성회원들의 일하는 자세는 주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이런 반응이야말로 교화의 시발점이요, 원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확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한울안운동에 대한 교단의 인식은 아직도 이런 교단적 의미를 깨닫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단순히 여성회가 하고 있는 국제활동이라고 보거나, 왜 교단시설을 직접 돕지 않는가, 심지어는 일반인 후원자가 있으니 원불교 사업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종교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세계적 추세 속에서 앞으로 원불교가 지향해야 할 시민운동은 한울안운동처럼 종교의 울을 넘어 일반인들과 함께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단에서는 범시민운동으로 여성회가 하고 있는 한울안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한껏 협력해서 더 많은 교도가 참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줘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사병행, 생활 속의 종교, 오만년 대운의 미래 종교 원불교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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